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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원릉(建元陵) -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1. 1. 22:30

    건원릉(建元陵)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능

     

    조선 제1대 왕인 태조(太祖,1335~1408,재위1392~1398)는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태어났고, 1392년에 조선을 창건한 후

    1408년에 돌아가셔서 이곳에 안장되었다.

    태조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군주의 무덤답게 동구릉 중에서 유일하게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대형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본래 태조는 먼저 돌아가신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도성 안에 조성하면서

    자신이 묻힐 터로 삼았으나, 태조의 아들인 태종이 이 지역에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건원릉을 관리하기 위하여 재궁(齋宮)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는 돌아가실 때 자신의 무덤에 고향에서 나는 억새(청완,靑薍)를 심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봉분에 억새가 심어져 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동구릉

     

     

     

     

    청완 예초의(靑薍 刈草儀)

     

    해마다 한식(寒食,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에는 구리시 동구릉(사적 제193호)에 있는

    태조 건원릉(健元陵)에 억새를 베는 청완 예초의(靑薍 刈草儀)가 열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7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 묻히길 원했다.

    그러나 왕릉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왕실 규율에 따라

    지금의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 묻혔다.

    이를 따르지 못한 태종은 부친의 무덤을 만들면서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인 ‘청완’을 가져다 봉분에 심었다.

    억새가 듬성듬성해지자 씨를 받아 다시 무성하게 만들었고

    매년 한식에 억새를 베고 능을 손질했다.

    1년에 5~7차례 잔디를 깎는 일반적인 조선 왕릉과 달리

    건원릉의 억새는 자주 베면 죽을 수 있어서 1년에 한번 한식날에만 벤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이 억새가 심어져 있다.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로서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홍살문

     

    홍살문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묘역 입구에 설치한다.

     

     

     

     

    참도(參道)

     

    참도(參道)는 왕릉에서 홍살문과 정자각 입구까지 깔아 놓은 이중의 박석(薄石)길이다.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조금 낮게 조성되었다.

    높은 쪽인 왼 쪽 길은 능묘에 모셔진 혼령의 길로,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로 향로(香路) 또는 신도(神道)라 표현하기도 하며,

    낮게 만들어진 오른쪽 길은 선왕의 능묘에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로 어로(御路) 또는 어도(御道)로 표현하기도 한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 보물 제1741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1408)에 건원릉과 함께 건립되었다.

    그 후 여러차례 수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건원릉 정자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제향을 모시는 상징성도 있지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중 길례(吉禮)의 단묘도설(壇廟圖說)과 비교할 때 건립 당시의 기본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조선왕릉 조영제도에 있어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크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공간이다.

     

     

     

    수라간

     

    수라간은 정자각의 서쪽에 있으며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소전대(燒錢臺)

     

    정자각의 북서쪽 뒤편에는 축문(祝文)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와 폐백(幣帛)을 묻는 정방형의 석물로 둘러쳐진 예감(瘞坎)이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두 가지가 모두 있고 세종 때부터는 예감 하나만 설치되었다.

     

     

     

    예감(瘞坎)

     

     

     

     

    태조 건원릉(太祖 建元陵)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에 있는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성되었다.

    태조가 승하한 이후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명당자리를 찾아 6천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의 현정릉(玄正陵) 양식을 많이 따랐으며 내부는 석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봉분 주위에 곡장으로 두르고 석물의 배치 등이 이전 고려 왕릉과 다른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부분도 있다.

    건원릉은 태종이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여 조성한 동구릉은 뒷편 검암산(儉巖山)을 주산으로 하고

    좌우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하고 있으며 남쪽의 안산을 바라보도록 능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로 덮여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흙을 가져와 봉분을 조성하고 억새로 덮었다고 한다  

     

     

     

     

     

     

     

     

    억새의 은빛 물결로 장관을 이루는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탁월한 무장으로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크게 활약했으며,

    개혁파 사류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왕이 된 후 이름을 단(),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和寧永興)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춘(子春)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조상은 전주의 향리였으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관리와 다툰 일로 170여 가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후 다시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했는데,

    원나라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자 1,000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원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후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을 역임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안변(安邊) 이북과 함주(咸州)지역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했다.

    아버지 이자춘1356(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고려를 도와 그 공으로 고려의 벼슬을 받았으며 ,

    1361년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려는 남북에서 대규모 외침에 직면하고 있었으나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군사제도가 와해된 상태였으므로

    이자춘 집안의 번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들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을 바탕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361년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군을 격파하자

    고려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박의를 살해했다.

    이어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의 탈환작전에 참여하여 선봉으로 성을 돌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하는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納哈出)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탁월한 용병술로 대적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364최유(崔濡)가 기황후(奇皇后)를 통해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왕으로 내세우고 요양성의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평안도지방을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隨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그가 출전한 틈을 타 여진족들이 그의 외종사촌 삼선(三善)·삼개(三介) 형제를 앞세워

    동북면에 침입하여 함주까지 함락시키자 즉시 회군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그해에 밀직부사가 되었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0년에는 원정군을 이끌고 요동까지 가서 원의 잔병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고려를 위협하던 김백안(金伯顔) 등을 물리쳤다.

    1371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1372년 이후에는 북방은 안정된 반면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는데,

    대규모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성계의 군대는 맹활약을 했다.

    특히 1377(우왕 3)에는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왜구와 격전을 벌여 승리했다.

    1380년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해로가 끊긴 왜구들이 내륙으로 들어와 상주·경산·함양을 차례로 함락시키자

    운봉에서 이들과 교전하여 적장 아기발도(阿其拔都)를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인데 이때 노획한 말만 1,600필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에 침입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출전하여 길주에서 궤멸시켰다.

    1383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스스로 찾아와 합류했으며 이후 차츰 주변에 혁명세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하고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고 그와 함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여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정벌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정벌에 나선 그는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설득하여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을 점령한 그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시중(右侍中)이 되었으며,

    조준(趙浚)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사류와 연합하여 정도전과 함께 개혁추진 세력을 확보했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운 후에는 수시중(守侍中)과 판상서사(判尙書事)가 되어 정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병권까지 장악했다.

    다음해 공양왕을 옹립하고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1390(공양왕 1)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준 등의 상소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양전(量田), 관찰사제 실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으며 마침내 13927월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법제도 고려의 법제를 사용한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태조의 치세에는 도평의사사·상서사(尙瑞司) 등 외형상으로는 고려의 유제가 많이 보존되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조선 국제의 기초가 된 많은 개혁조치가 시행되었다.

    1393(태조 2)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해부터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는 한편 정도전과 조준을 내세워 국가제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했다.

    토지제도와 함께 재정제도도 개혁하고 노비변정사업을 실시했다.

    인사제도를 정비하여 서리출신의 관료등용을 제한하고 지방의 사족들에게 문호를 넓혔다.

    성균관과 향교제도도 정비하여 전국 군현에 교수관을 파견했으며,

    과거제도도 개혁했다. 또한 피폐한 토지의 개간정책을 시행하고 농민안정을 위해 의창제를 복구했다.

    군현제도 정비하여 도제(道制)를 시행하고 도별로 재상급의 관찰사가 지방행정을 총괄하게 했다.

    군제에 있어서는 부병제와 무과를 시행하고, 전국의 군사조직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이로써 국가의 통치력이 일신되었으며 왜구의 침입도 잠잠해졌다.

    한편 도첩제와 사원 정리 등 억불정책도 시행했는데 태조 자신이 독실한 불교도였던 관계로 철저하게 시행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개혁조치를 정리하여 1397년에는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편찬했다.

    건국 초에는 정도전·조준·남은(南誾) 등 개국공신 계열이 득세했고,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권근(權近)·하륜(河崙)·성석린(成石璘) 등의 신진사류 중에서 중도·온건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종학(李鍾學)·이숭인(李崇仁) 등이 살해되기도 했으나, 태조는 곧 이들을 복권시켰다.

    이후 이들은 표전사건(表箋事件)을 통해 정도전 계열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태조는 강씨 소생의 어린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것이 이방원(李芳遠) 이하 왕자들의 불만을 싹트게 했다(왕자의 난).

    1398년 태조의 와병을 계기로 이방원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남은 일파를 제거하고 곧이어 방석·방번(芳蕃)마저 살해했다.

    결국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태종 즉위 후에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태조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의 사택 등에 머물며, 사냥과 불공으로 소일하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는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낼 때마다 죽여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402(태종 2) 무학(無學)의 설득으로 귀경하여 불도에 정진하며 지내다가 1408524일에 세상릉 떠났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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