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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묘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0. 27. 18:55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묘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詩仙 蘭皐 金炳淵之墓)








    還甲(환갑)


    披坐老人不似人(피좌로인불사인)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아니하고

    疑是天上降神仙(의시천상강신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가 하노라

    膝下七子皆爲盜(슬하칠자개위도)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 것이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를 빛내누나.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복숭아로서 이것을 먹으면 2천년을 산다는 전설이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金笠)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사선생의 후예로 휴암공파계 제24대 손이다.

    1807(순조7) 3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김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成深), 호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다.

    선생은 5세 때 선친 부사인 조부 익순이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조모 전주 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으며,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갔다.

    선생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모친은 아기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후일에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모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친은 홧병으로 죽었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선생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모르고 자랐으며, 20세 때 한살 연상인 장수 황씨와 결혼하였다

    그 해 영월 동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시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에 대하여

    가산 군수 정씨를 예찬하고 선천 부사이자 방어사이던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22세 때 아들 학균을 낳은 뒤 상경하여

    이름으르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안응수의 문객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권문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귀가하여 형 병하에게 아들 학균을 입양시키고

    그해 차남 익균을 얻었지만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올랐다.

    그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삿갓은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방랑하는 삶을 선택한 조선후기의 방랑시인이다.

    그는 한시(漢詩)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던 천재시인이기도 하다

    김삿갓은 당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는 스스로 성()만 말할 뿐 이름은 밝히지 않아 정체를 숨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삿갓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연유로 김삿갓(金笠, 김립)이라 불렀다

    김삿갓의 방랑은 철종 14(1863)에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끝이 난다.

    이후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김삿갓의 묘를 영월(하동면 와석리 노루목)로 이장 하였다.

    영월은 김삿갓의 방랑의 시작지이자 종착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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