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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릉(泰陵) - 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0. 23. 05:00

    태릉(泰陵) - 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中宗)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능이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능제를 따르고 있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겼고, 만석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태릉을 시작으로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을 봉분 주위와 앞에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었으며,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 (공릉동)

     



    조선왕릉 세계유산




    홍살문()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나무 건축물로

    출입문의 역할을 했지만,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시 되었던 문()이다.

    형태는 한자 ''의 형상에서 따온 것이다. 문이지만 주변에 담장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목적은 없다.

    9m 이상의 둥근기둥을 지주석 위에 고정시키고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문짝은 달지 않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삼태극 문양을 설치했다. 하지만 태극문양과 삼지창이 없는 형태도 많다.

    홍살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홍살문을 설치하는 곳은 서원이나 향교에 설치하였으며, 집안 재실에도 설치하였다.

    또한 능과 묘에도 설치했으며 충신, 열녀,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도 홍살문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배위(拜位)


    홍살문 오른쪽에는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세로 6(1.8m) 정도의

    네모난 배위(拜位, 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함)가 있다.

    이 배위에서 혼백을 부를 때 4배한다.




    홍살문 앞에서부터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박석)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御道)로 구분돼 있다.

    좌측의 신도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도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90m)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능에 모신 분을 위하여 제례를 드리는 곳이다.

    지붕 모양이 정()자를 이루고 있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태릉 정자각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자각 오른편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소맷돌이 있는 왼쪽의 계단은 혼령이 오르는 곳이고,

    오른쪽의 계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관이 오르는 곳이다.

    정자각 왼편의 계단은 제관이 축문을 태우러 갈 때 사용한다.






    능의 역사


    1565(명종 20)에 문정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 산릉자리를 중종의 정릉(靖陵) 부근으로 하였다가(신정릉,新靖陵),

    명종의 반대로 산릉자리를 다시 정하였다.

    이후 현재의 자리로 산릉이 결정되면서 능의 이름을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와 의논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의 능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선릉 동쪽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문정왕후는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태릉의 표석(表石)

     

    태릉의 표석은 영조 29(1753)에 조성하였다.

    표석 앞면의 '조선국문정왕후태릉(朝鮮國文定王后泰陵)'은 홍계희(洪啓禧)의 필체이며,

    뒷면의 비문은 낙풍군(洛豊君) 이무(李㮊)가 썼다.

     

    (앞면)

    조선국문정왕후태릉(朝鮮國 文定王后 泰陵

     

    (후면)

    성렬인명(시호)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대왕의 계비(단경왕후와 장경왕후의 뒤를 이은 왕비)로서

    홍치(명나라 중기 연호) 14년 신유년(연산군 7,1501) 1022일에 탄생하였다.

    정덕(명나라 중기 연호) 12년 정축년(중종 12, 151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가정(명나라 연호) 44년 을축년(명종 20, 1565) 47일에 승하하시어

    그 해 715일 양주 남쪽 노원면(지금의 노원구 공릉동산) 임좌지원(북북서를 등진자리)에 장례 모셨는데 65세를 사시었다.

    승전 기원(명나라 말기 연호가 처음 시작된 해)126년 만에 처음 비를 세웠다.(건륭 19, 갑술년, 영조 30, 1754)





    참도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2,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산신석(山神石)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웠는데 규모는 혼유석의 4분의 1 정도다.




    예감(隸坎) - 망료위(望燎位)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세로 2, 깊이 30cm 정도의 정()자 형태로 나무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조선왕릉전시관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궤(莊烈王后 殯殿都監儀軌)


    인조의 비 장렬왕후(1624~1688)가 돌아가신 후 빈전(殯殿)에서 행하였던 의례 절차를 정리한 의궤이다.

    어람용으로 제작되어 붉은 줄로 테두리 선을 넣었고 고급 종이를 사용하여 정성껏 제작하였다.




    순조인릉 산릉도감의궤(純祖仁陵 山陵都監儀軌)


    1834(헌종 즉위) 11월부터 18354월까지 순조(純祖, 1790~1834)의 능()

    인릉(仁陵)을 조성한 과정에 대해 기록한 의궤이며, .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릉도감의궤 하권에는 왕을의 제작 과정과 석인상, 장명등 등 도설이 함께 그려져 있다.




    강명달 광릉참봉 교지(姜命達 光凌參奉 敎旨), 조선 영조 38(1762)


    강명달(17091790)1762624일에 세조 광릉의 참봉으로 임명하는 교지이다.

    강명달은 1787(정조 11)에 인경왕후 익릉의 영()으로 임명 되었고,

    1788(정조 12)에 정3품에 해당하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문정왕후(文定王后) 태릉(泰陵) 이야기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장경왕후 희릉과 함께 조성되어 있던

    중종 정릉을 현재의 강남구 선정릉 지역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지대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실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되어 있다.

    태릉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도굴될 뻔한 일이 있었다.

    왜적은 태릉에 금은보화가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주민을 동원하여 능을 파헤쳤으나

    단단한 회격(灰隔)을 깨뜨리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당시 이언진이라는 인물이 태릉의 변을 보고 슬퍼하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밤새 흙을 져다가 능을 수리하였는데, 후에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상을 받았다.









    제수진설도






    세계가 주목한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20096월 조선왕릉 42기 중에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다.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의 명당을 선정하고,

    최소한의 시설을 설치하여 주변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지도록 하였다.

    왕릉 조성과 관련된 모든 절차와 이후 관리 실태는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모범으로 삼으면서 왕릉관리에 만전을 기하였다.

    현재까지도 조선왕릉에서는 매년 산릉제례를 행하면서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조선왕릉은 왕을 기리는 공간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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