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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침,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장릉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8. 22. 04:30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침, 장릉(章陵) - 사적 제202


    장릉은 추존된 원종(元宗,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로 1587(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 졌으며, 1619(광해군 11) 세상을 떠났다.

    1623(광해군 15) 첫째 아들 능양군(綾陽君, 인조)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大院君)에 추존(追尊)되었다.

    인헌왕후는 1590(선조 23) 정원군의 부인이 되어 3(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啓運宮)이 되었으며, 1626(인조 4)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32(인조 10)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능의 이름은 장릉이 되었다.

    능에는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으며, 능으로 승격되면서 문.무석인 등의 석물이 다시 세워졌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 종합안내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장릉)




    사적 제202호 장릉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향로는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왼쪽)

    어로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이다.(오른쪽)


    관광객은 오른쪽의 어로를 통해 걸어가야 한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린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고 삼도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능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비각(碑閣)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祔左)







    육경원의 비석 받침돌


    인조의 어머니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추존 인헌왕후)1626(인조 4)에 승하하자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고 이곳 김포에 예장하였다.

    1627(인조 5)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추존 원종)의 무덤 흥경원(興慶園)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서 육경원으로 옮겨와 두 원()을 합하여 흥경원으로 하였다.

    1632(인조 10)에 흥경원을 장릉(章陵)으로 격상시키면서 종전에 있던 석물들 중

    사용하지 않게 된 일부를 능 좌측 언덕에 묻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육경원의 비석 받침돌이 지상으로 노출(2007)되어 이 자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장릉 봉분(능침)


    사진 왼쪽이 원종의 능이고, 오른쪽은 인헌왕후의 능이다.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 형식이다 

















    寢下荒池一任他(침하황지일임타)

    十丁攻役兩旬過(십정공역양순과)

    非要遠客遊觀美(비요원객유관미)

    是爲齋官闕漏多(시위재관궐루다)

    石噔霾雲籠小嶼(석등매운롱소서)

    金塘霽月印淸波(금당제월인청파)

    先王遺澤民來子(선왕유택민래자)

    展矣宗邦福不那(전의종방복불나)

     

    능침 아래 황폐해진 연목 줄곧 그대로 두었는데

    열 장부가 일하여 이십일 만에 완성하였네.

    나그네가 노니는 즐거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재관이 빠뜨린 것이 많아서라네.

    돌길에 낀 안개는 작은 섬을 두르고

    금빛 연못에 밝은 달은 맑은 파도를 비추네

    선왕이 남긴 은택 덕분에 백성이 자식처럼 오니

    진실로 종묘와 사직에 복이 아니겠는가.

     

    위의 시는 철종 즉위년(1849) 1226일 장릉령(章陵令)에 임명된 이제상(李濟))

    1850년에 연지를 수리하고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장릉지(章陵誌)에 수록되어 있다.

     



    蓮池(연지)


    조선 왕릉의 진입공간에는 연지가 있다. 연지는 왕릉을 조성할 때 재실과 금천교 부근에 조성한다.

    왕릉의 연지는 사각형의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둥근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원지원도형(圓池圓島形)이 주를 이루고 있다.

    원도(圓島, 둥근 섬)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근거를 두어 음양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히 김포 장릉의 연지는 다른 왕릉의 연지와 비교하였을 때 잘 보존되어 있다.

    장릉의 연지에는 다양한 철새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천연기념물인 참매(323-1), 수리부엉이(324-2),

    원앙(327)을 포함하여 멸종위기종인 황조롱이(323-8)와 말똥가리 등이 계절을 바꾸어 찾아온다.

    그 밖에 오리, 백로, 산새 등 60여종의 새들이 연중 서식하고 있다.





    장릉 재실(章陵 齋室)


    이 건물은 원종(元宗)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安香廳),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그 외 부속공간인 행랑(行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실(齋室)


    제향을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영(令)과 참봉(參奉) 등이 사용하던 공간이다.






    행랑(行廊)


    대문, 하인방, 마굿간, 창고, 집사방 등이 있는 부속 건물이다.
















    김포 장릉(金浦 章陵) - 사적 제202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부모인 추존 원종과 인현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7년에 정원군에 봉해졌고 16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623년에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1626년에 묘()를 원()으로 높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32년에 원종으로 추존되고 원을 능으로 높여 장릉이라 하였다.

    인현황후는 구사맹(具思孟)의 다섯째 딸로 1590년에 연주군부인에 봉해졌고

    1623년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啓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되었다.

    1626년에 세상을 떠나 김포에 원을 조성하고 원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다.

    1627년에 흥경원이 김포로 옮겨지면서 원의 이름을 홍경원이라 하였으며 1632년에 인현왕후로 추존되었다.

    홍경원이 장릉으로 승격되면서 봉분의 호석과 문석인을 제외한 석물은 다시 세웠다.

    장릉의 재실과 연지는 원형이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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