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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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長水黃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2. 4. 19. 04:10
장수황씨 상징 조형물 작품명 : 청백리(淸白吏) 작가 : 황혜진 자자손손 장수황씨는 세상이 귀감이 되는 성씨로 번성해 나가는 대종회가 되기를 염원하는 의미로 표현하였다. 작품의 주재료는 마천석, 상주석, 황등석, 오석으로 석재의 색채를 활용한 조형물이다. 청백리 작품은 장수황씨의 선조인 황희 정승의 초상조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고자 계획한다. 하단부의 원형 기단은 장수황씨의 유래와 작품 제작을 위해 공헌하신 후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공간으로 제작될 것이다. 장수황씨(長水黃氏) 유래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말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이시며 시중(侍中)이셨던 황경(黃瓊)공이다. 그 후손 황공유(黃公有)공은 고려 명종(明宗) 때에 전중감(殿中監) 벼슬을 지내시다가 선대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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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의 재상(宰相), 맹사성(孟思誠)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0. 14. 19:12
맹사성은 시가와 음률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 태종과 세종대에 관습도감 제조로 음악을 정비하고 악인(樂人)을 교육하였다. 항상 피리(玉笛, 옥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서너 곡을 연주하였는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그가 집에 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흑기총 설화(黑麒塚 說話) 흑기총은 맹사성과 검은 소(黑牛) 설화에 등장하는 검은 소의 무덤이다. 하루는 맹사성이 산에 오르던 중 아이들이 검은 소를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맹사성은 아이들에게 짐승이라도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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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 만휴정 너럭바위국내 나들이/명승(名勝) 2021. 6. 6. 04:21
만휴정 입구 외나무다리에서 한복을 입은 오누이의 다정한 포즈 만휴정(晩休亭)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만휴정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이 말년에 독서와 학문을 연구하려고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1480년 50세의 나이로 과거의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하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향리로 돌아와 숨어 살았다. 그는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호는 그가 일찍이 읊었던 시 구절 가운데 ‘우리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라는 글에서 따왔다. 1498년 안동에 내려와 지은 집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보백당’이라 하였다. 보백당 바로 옆에 지은 정자인 만휴정의 이름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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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長城 朴守良 白碑) - 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0. 7. 16. 04:15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정혜 박공 신도비(資憲大夫 議政府 右參贊 貞惠朴公 神道碑) 전서는 의정부 우찬성 이용원이 썼다. 신도비가 세워진 때는 정해 3월이다. 정해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1887년이다. 신도비는 경연관 서연관 송병선이 글을 짓고 공조판서 겸 의금부사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 아곡 박수량 묘비 박수량은 별세 후 250년이 지난 1805년에 정혜공이란 시호를 받았고, 묘비는 박수량 사후 330년 지난 1888년에 세워졌다. 묘지 비문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지만, 끝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의 이름이 남아 있어 하서가 쓴 묘지명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청백리 제도 청백리란?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가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되어 청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