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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 만휴정 너럭바위
    국내 나들이/명승(名勝) 2021. 6. 6. 04:21

    만휴정 입구 외나무다리에서 한복을 입은 오누이의 다정한 포즈

     

     

    만휴정(晩休亭)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만휴정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이

    말년에 독서와 학문을 연구하려고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1480년 50세의 나이로 과거의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하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향리로 돌아와 숨어 살았다.

    그는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호는 그가 일찍이 읊었던 시 구절 가운데

    ‘우리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라는 글에서 따왔다.

    1498년 안동에 내려와 지은 집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보백당’이라 하였다.

    보백당 바로 옆에 지은 정자인 만휴정의 이름은 ‘말년에 쉬는 정자’라는 의미로 지었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寶白堂晩休亭泉石(보백당만휴정천석)’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보백당이 말년에 쉬는 정자와 산수의 경치’라는 의미다.

     

     

     

    寶白堂晩休亭泉石(보백당만휴정천석)

     

    '보백당이 말년에 쉬는 정자와 산수의 경치’라는 의미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나의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오로지 보물은 청백뿐이다(寶物惟淸白).”

     

     

    안동 만휴정 원림(安東 晩休亭 苑林) - 명승 제82호

     

    만휴정 원림은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선생께서 1501년 길안 묵계로 낙향하시어

    만년을 머물며 독서와 사색을 즐기기 위해 마련한 정자(만휴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73호)와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말한다.

    계곡에 넓게 펼쳐져 있는 반석과 흐르는 물, 기암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송암폭포의 위용,

    솔향 그윽한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느낄 수 있는 그윽함,

    그 속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듯한 만휴정 정자는 자연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자연과 융합되고자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안동 선비 김계행의 만휴정 흔적

    조선시대에도 학문을 닦은 후 조정에 출사해 유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선비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속세를 잊고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이 말년에 귀거래하여 지은 정자다.

    김계행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50세 되던 해 식년시에 급제하여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 때 대사간에 올랐으나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처음에는 풍산사제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칭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를 보백 선생이라 불렀다.

    보백이란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곧고 깨끗함을 뜻하는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는다는 의미다.

    1501년 고희를 넘긴 보백 선생 김계행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일찍이 마련한

    지금의 ‘보백당 종택’에 정착하고, 산속 계곡의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만휴정은 김계행의 장인 김전(金腆)이 지어 처음에는 쌍청헌(雙淸軒)이라는 당호로 불렀다고 한다.

    김계행이 만년의 늦은 나이에 이곳을 은거생활의 장소로

    즐겨 사용한 것에서 이름이 만휴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김계행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전형을 보여준 올곧고 강직한 선비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했으나

    청렴을 제일로 하는 청백리의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나의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오로지 보물은 청백뿐이다(寶物惟淸白).”

    이토록 청렴하고 결백한 그의 삶에 대한 정신은

    자신의 호이자 종택의 당호인 ‘보백당’의 의미를 담은 시에도 잘 나타난다.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하리길 42 (묵계리) 만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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