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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학문을 강론한 정유(鄭裕)선생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08. 9. 24. 21:04
임금(王)에게 학문을 강론한 "정유(鄭裕)" 선생
정유(鄭裕)선생(1503~1566)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공작(公綽).호는 양진당.
이손(二孫)의 손자로, 통진현감 수강(壽綱)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진경원(陳敬源)의 딸이다.
연산군 10년(1503년) 출생하여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37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무술년에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승문원정자·저작·박사·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예조좌랑을 지냈다.
잠시 충청도도사로 나갔다가 공조정랑·집의가 되었으며, 곧 직강이 되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사섬시· 장악원· 내자시의 정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사인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으로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사간이 되었다가 대호군으로 옮긴 후,홍문관에 들어가 교리·부응교를 지냈다.
1551년 직제학에서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부제학을 거쳐 1554년 대사간에 이르고
그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대사헌이 된 뒤 이어 한성부윤·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나 신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학문과 제왕의 길을 강론, 왕의 총애를 받았다.
정유선생은 오랫동안 왕에게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사생활이 청빈하였으며 가정에서는 효우로 일관하였다.
당시 정권은 외척의 기세가 실로 당당하여 감히 이를 말하는 자가 없었으나
정유선생은 그 방자와 횡포를 마땅히 제재할 것을 임금께 직언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정유 선생의 묘는 수원시 영통구 하동 원천저수지변 나트막한 자리에 있으며 정부인 청주한씨와 쌍분을 이루고
중앙에는 묘비와 상석 각1기, 그 좌우에는 문인석 2기와 망주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묘역은 1566년 조성하고, 묘비는 1586년에 건립하였다.
정유선생의 묘는 1990년 1월 4일 수원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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