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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의 정치철학을 담은 '여민각(與民閣)'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08. 10. 10. 05:41

    정조의 정치철학을 담은 '여민각(與民閣)'

     

    조선 정조대왕이 '신도시 화성(華城)'을 축성할 당시 화성행궁 앞에 건립했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종각(鐘閣)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수원시는 팔달구 팔달로1가 화성행궁 건너편에 종각을 세워 2008년 10월 8일 오후 준공식을 가졌다.


    정조대왕은 양경(兩京) 개념의 도성체제로 화성유수부(지금의 수원)에

    행궁과 성곽, 4대문, 성신사, 사직단, 문묘를  세운 데 이어

    1794년 무렵 행궁 앞 십자로에 종루를 건립했다.

    이번에 준공된 종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은 정조시대 종루를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의 조사와

    서울대 한영우 교수의 연구를 토대로 옛 모습에 가깝게 중건한 것이다.

    중건된 종각명은 정조의 정치철학을 담아 '여민각(與民閣)'으로 지어졌고

    종명은 '인인화락(人人和樂) 호호부귀(戶戶富貴)  수원위본(水原爲本) 세방창화(世邦昌華)'로 명명됐다.

    종(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성종사 대표가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을 모델로

    무게 20t, 높이 3.2m,  직경 2.2m 크기로 제작됐다.

    종각 중건공사에는 보상비 70억원, 공사비 30억원, 종제작비 9억원 등 모두 109억원이 들어갔다.


    수원시는 종각 준공과 제45회 수원화성문화제 개막을 기념해 이날 밤 타종식을 열었다.

     

    여민각(與民閣)준공 제막에 앞서...

     

    여민각 편액 제막후...

     

                 

    제막식후 기념 테이프 커팅 및 기념촬영

     

     

    제막식후 가진 기념 타종(打鐘)

     

    여민각 준공을 기념하는 수원시립합창단의 축하 공연...

     

     

    (여민각의 대종을 28번 친 이유?)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해시계가 보급된 후엔 좀 나아졌지만 밤중에 시간을 몰라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정부가 맡은 큰 일 중 하나였다.

    자시(子時) 축시(丑時) 인시(寅時) 등으로 불렀던  하루 12시간 중 밤에 해당하는 5시간,

    즉 술시에서 인시까지는 이를 초경 이경 오경으로 나누어 각 경마다 북을 쳤다.


    또 각 경은 다시 5점(오점)으로 나누어 각 점마다 징이나 꽹가리를 쳤다.

    한 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 한 점은 24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소리를 모든 주민이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대문이 닫히고 주민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밤 10시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새벽 4시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렸다.

    이경에는 대종을 28번 쳤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했고, 오경에는 33번 쳐 이를 파루()라 했다.


    인정에 28번을 친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이십팔수(28별자리)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고,

    파루에 33번을 친 것은 제석천(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었다.


    새해 첫날이 밝는 자정,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은

    조선시대에 이른 새벽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33번 친데서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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