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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설악 만경대에서 본 오세암(五歲庵)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08. 10. 22. 07:49

    내설악 만경대(萬景臺)에서 본 오세암(五歲庵)


    관음 나한 성지 오세암(五歲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五歲庵)은 백담사의 산내 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개 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뒤로는 관음봉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오른쪽에는 만경대가 굽어보고 있다.

    앞으로는 용아장성릉이 삿된 기운을 막는 듯 오세암을 안고 있다.

    오세암이 창건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른 것이 오세암의 시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도 1445년(조선 세조 1) 여기서 출가했다.

    이후 오세암은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스님에 의해 크게 중건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금강산에서 수도하다가 불교중흥의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기도하던

    보우 스님이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고 난 직후 암자를 중건한 것이다.


     


    오세암(五歲庵)으로 가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있다.

    언덕마루에서 약 15분간 여유롭게 오르면 설악과 대자연의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자리가 벼랑 끝에 서 있는데, 그 곳이 만경대(萬景臺) 또는 망경대(望景臺)라 부른다.

    그 곳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오세암의 전경이다.


     


    만경대에서 본 오세암(五歲癌) 전경


    오세암은 백담사에 딸린 작은 암자이지만 만해 한용운 선생과  금오신화의 김시습 선생이 머문 곳이다.

    우리 민족의 암울한 시대에 만해 선생이 이곳에 머물면서 대자연을 바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낙엽이 되어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오세암의 각종 시설물이 보이고.


     


    오세암 주변을 비롯해 내설악은 온통 붉게 물든 치마를 입은 듯 화려하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지지만 산사를 찾은 탐방객과 관광객, 신도들의 발길이 생동감을 준다.


     


    오세암에 얽힌 전설

     

    오세암의 5살 동자

     

    조선 인조(1643)에 설정(雪淨)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이 오세암(五歲庵)을 중수한 뒤의 일이었다.

    스님에게는 다섯 살 되는 조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일찌기 양친을 여의고 이 절에 와 있었다.

    그 해 날이 몹시 짧은 늦가을 10월이었다. 스님이 강원도 영동쪽에 볼일이 있어 조카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관세음보살만 부르면서 오늘밤 혼자 자면 내일에 내가 돌아오겠다고 하고, 암자를 떠나 영마루를 넘어 갔다.

    그러나 그날 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길도 골짜기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눈이 산같이 쌓여 길이 막히고 보니, 스님도 돌아올 수 없었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기 시작하여 봄이 된 후에 스님은 조카가 죽었거니 한탄하며

    돌아오니 조카가 승방에서 관세음보살을 염북하고 살아있었다.

    스님은 놀란 나머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조카는 "인자하신 어머니가 와서 먹을 밥과 그리고 젖을 주며

    이부자리며 방도 뜨시게 하여 주셔서 죽지않고 삼동을 살았습니다."고 하였다.

    스님은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그순간 어디선가 바람소리 같이 휙하는 소리와 함께

    흰옷을 입은 부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난 후 스님께 보리기(菩提記)를 주고 파랑새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다섯 살 어린 동자가 득도하였다하여, 이 절 이름을 오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오세암의 절 명칭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단종의 폐위에 반대해 방랑의 생활을 하면서

    이 절에서도 머물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김시습은 당시 다섯 살 때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어 오세신동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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