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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난파노래비(洪蘭坡 노래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3. 2. 26. 05:37

    홍난파 노래비(坡 노래碑)

     

    수원시의 중심부 팔달산 기슭에는 한국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너비 1.5m, 높이 3m의 화강암으로 된 노래비(碑)의 상부에는 난파의 동판 초상화가,

    아래엔 '고향의 봄' 노래판과 악보가 새겨져 있다.

    이 노래비는 수원이 고향인 난파(蘭坡)의 공적을 추모키 위해 1968년 10월 15일,

    탄생 70주년을 맞아 수원 시민의날 행사인 화홍문화제 때 세운 것이다.

     



    (홍난파 소개)

    홍난파(1898.4.10~1941.8.30)는 본관은 남양(), 본명은 영후()이다.

    189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2년 YMCA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친 뒤 동 전습소 교사가 되었다.

    1916년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행진곡풍의

    야구 응원가인 창가() "야구전"을 작곡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 무렵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으며, 소설 "처녀혼", "향일초()"

    "폭풍우 지난 뒤" 등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로 있다가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 사회교화 단체인

    조선문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였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작품에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17권의 편저작물이 있다.

    이밖에 저서에는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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