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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전통 기와집, 정순왕후 생가(貞純王后 生家)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3. 5. 29. 05:15
목조 전통 기와집, 정순왕후 생가(貞純王后 生家)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목조 전통 기와집이다.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1692~1757)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충청감사, 예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金積, 1564~1646)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때(1649~1659년)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이 가옥에서 김홍욱(金弘郁,1602~1654, 김적의 아들)의 4대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출생했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ㆍ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안채의 건물에 죄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庫房)과 안방 부엌이 이어져 있고 대청 좌측에 제실, 건너방, 광 등이 있고
광 옆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칸이 나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 와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다.
화강석 1벌대 기단 위에 덥벙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일고주 오량 집으로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이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1988년 8월 30일 충남기념물 제6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소유자 김기흥)
순국선열 백림 김용환묘비(殉國先烈 白林 金用煥墓碑)
1892년 8월 1일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번지 출생
1919년 8월 13일 중국 절강성 항주시 절강병원 순국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 추서(追敍)
2003년 12월 10일 중국 절강성 항주시 고탕산에서 국가보훈처답사반 묘비발견
2003년 12월 31일 조국으로 유해봉환 현충원 안치
2004년 1월 7일 대전국립묘지 독립유공자 제3묘역(67호) 배위창원황씨 합폄(合窆)안장(安葬)
순국선열(殉國先烈)께서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修學)하시고 관직에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 중심단체인
조국민족대동단(祖國民族大同團)에 가입 거금의 독립자금(獨立資金)을 모금, 특수임무 수행을 위하여 중국에 망명(亡命)하였다.
항주에서 신규식(申圭植, 臨時政府 國務總理), 신환(申桓, 申健植 臨時政府議政院 常務議員), 정환범(鄭桓範, 臨時政府要人) 등
망명우국지사와 활동 중 순국하였다.(독립신문 1919년 9월 13일자 부음기사와 부고)
묘비는 중국에서 조국에 반입 순국선열 생가지(生家址)에 모셨다.
대한의 상징인 태극문양(太極紋樣)이 각인(刻印)된 묘비(墓碑)가 오랜 세월 역경을 견디며
그리운 조국품으로 환국(還國)하심은 우리역사에 찬연(燦然)히 빛날 것이다.
(2004년 2월)
한다리 김씨(金氏) 세거비(世居碑)
역조(歷朝)에 많은 명현(名賢)을 배출(輩出)한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다리 김씨 집성촌(集姓村)
한다리 마을의 내력(來歷)을 명기(銘記)하여 후세(後世)에 길이 전(傳)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대교천(大橋川)이 상왕산(象王山)과 양대산(良大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용유대(龍遊臺)에서 합류(合流)한 후 단구대(丹邱臺)를 거쳐 한다리 마을을 감싸 흐르고
뒤로는 가야산(伽倻山)과 양대산(良大山)에서 뻗어내려 정기(精氣)어린 취영봉(鷲嶺峯)이
또한 이 마을을 감싸 안은 길지(吉地)에 한다리 김씨(金氏)가 대(代)를 이어 살게 된 것은 400餘年前의 일이다....
(以下 中略...)
현 소유 및 거주자 김기흥
독립유공자 백림 김용환지사 본가(獨立有功者 白林 金用煥志士 本家)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영조 21)∼1805(순조 5).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된 뒤
66세의 영조(英祖)와 가례(嘉禮)를 행하고, 1772년에는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성철(聖哲)·명선(明宣)·융인(隆仁) 등의 존호(尊號)를 받았다.
소생은 없지만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讒訴)가 심하더니,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10가지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廢位)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뒤 당쟁(黨爭)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獄死) 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형제는 전라도지방으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편으로는 그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호(諡號)는 정순(貞純)이며, 능호는 경기도 구리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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