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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미원(洗美苑) 약속의 정원, 세한정(歲寒庭)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4. 9. 27. 05:20

    세미원(洗美苑) 약속의 정원,  세한정(歲寒庭)

     

    세미원(洗美苑) 안에 있는 세한정(歲寒庭)은 선비의 지조와 절개가 담긴 세한도를 표현해 낸 정원이다.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그림이다.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 세미원에서 =

     

     

     

     

     

     

     

     

     

     

     

     

     

     

     

     

     

     

     

    세한도의 긴 여정(세한도가 오늘에 있기까지)

     

    세한도는 200여년 동안 이리저리 유랑의 길을 걸어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생활 중이던 1839, 세한도를 완성하여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다.

    제자 이상적은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의 학자들에게 보여주고 제영을 받아 다시 제주도의 스승께 보여 드린다.

    그후 세한도는 일제시대 때,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후지츠카 교수의 손에 넘어가고

    후지츠카 교수는 세한도를 일본 동경으로 가져간다.

    이에 서예가 손재형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후지츠카 교수에게

    두달여간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44,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그해 후지츠카 교수의 집이 폭격을 맞아 많은 추사의 자료가 불타 버린다.

    "세한도의 긴 여정"은 세한도가 이렇듯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자 제작 되었다.

     

    1. 명문의 집안에서 귀하게 태어나다 1789년(정조 10년, 1세)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 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던 이름 난 명문 가문인 경주 김 씨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증조모로 왕실의 훈척(勳戚)이었다.

     

     

    2. 어릴 때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을 놀라게 하다 1792년(정조 16년, 7세)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시 73세였던 명재상 채제공이

    추사가 쓴 입춘첩을 보고 글씨로 이름날 것을 예언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8세 때는 절손(絶孫)이 된 큰아버지 댁으로 양자를 가게 된 후

    어린 나이에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문안 편지를 남겨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3. 중국에 가서 더 넓은 학문의 세계를 넓히다 1809년(순조 9년, 24세)

     

    24세 젊은 나이로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 평소에 만나고 싶던

    대학자들을 찾아뵙고 학문을 토로하며 중국 학계를 놀라게 한다.

    특히 중국의 원로학자인 옹방강과 학계의 떠오르는 학자인 완원은 추사에게

    실학 고증학 등의 핵심을 알려주며 추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4. 조선의 금석학을 발전시키다 1816년(순조 16년, 31세)

     

    추사의 학문 세계는 유교는 물론 불교, 노장, 실학 그리고 금석학 고증학에까지 다방면에 일가견을 이루어갔다.

    31세에 북한산에 있는 이름 모르는 오래된 고비가 진흥왕 순수비라는 걸 처음 밝혔다.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기 위해 여러 차례나 북한산 비봉에 올랐으며

    우리나라의 옛 비문들을 연구하여 조선 금석학을 독립된 학문 분야로 발전시켰다.

     

     

    5.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다 1819년(순조 19년, 34세)

     

    성균관 유생에게 치르는 시험에서 제술(글짓기)로 수석을 차자하였고 그해 4월 25일 문과에서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드디어 관직에 올라 정치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세자를 보좌하였으나

    이로 인해 소인배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6. 제자 양성에 힘쓰다 1823년(순조 23년, 38세)

     

    벼슬이 높고 학문이 깊어 많은 이의 추앙을 받았다. 38세에 규장각 대교로 제수되었다.

    41세 되던 해 충청도의 암행어사, 51세 성균관 대사성, 54세 형조참판이 되었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에 더욱 힘써 많은 젊은이들이 앞 다퉈 제자가 되려고 했다.

    반상이나 서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역관 이상적도 이때에 추사의 제자가 되어 교분이 두터워졌다.

     

     

    7. 누명을 쓰고 제주도에 유배되다 1840년(헌종 6년, 55세)

     

    경주 김씨 가문 중에 특히 추사에 대해 안동 김씨의 집중적임 모함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귀양 가는 뱃길 중간쯤 갑자기 풍랑이 심하게 일어 모든 사람들이

    죽었구나 하고 체념을 했지만 추사는 뱃전에 홀로 앉아 배의 방향을 정확히 알려주어

    아침에 출발한 배가 저녁에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8. 우선이 중국에서 책을 구해주다 1843년(헌종 9년, 58세)

     

    추사의 타는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모금의 시원한 냉수가 있었으니 바로 제자 이상적의 책 선물이었다.

    스승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상적은 직업이 대대로 통역관이었다.

    사행으로 중국 북경에 갈 때마다 새로 발간되는 명서들을 구해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북경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말에 실리고 배에 실리고 등짐에 지워져 스승 추사에게 전달되었다.

     

     

    9. 외롭고 쓸쓸하게 귀양살이하다 1843년(헌종 9년, 58세)

     

    제주도 남쪽 끝 바닷가의 조그마한 집 탱자나무 울타리, 감옥 아닌 감옥 속에서 허름한 잠자리 보잘 것 없는 시골 음식,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움은 겹겹이 몰려오는 모진 파도와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움보다 더 모진 고통이 있었으니 손에 들고 읽을 마음의 양식인 책이 없다는

    독서에 대한 갈급함이 지식인으로서 가장 견디지 못할 고문이었다.

     

     

    10.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다 1844년(헌종 10년, 59세)

     

    귀양살이 5년째 제자 이상적으로부터 추사가 매우 읽고 싶어 하던 우경문편을 선물로 받게 된다.

    청나라의 하장령과 위원이 공동으로 엮은 책으로 모두 120권 79책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문집으로 1827년 간행된 책이었다.

    등짐으로는 몇 보따리가 되고 수레에 실으면 한 수레가 되는 많은 양이었다. 책을 받은 추사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고 싶었던 책이 아닌가. 아아! 이 기쁨, 이 감격, 이 고마움이여!

     

     

    11.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 탄생하다 1844년(헌종 10년, 59세)

     

    세한도를 완성한 후 추사는 무언가 허전하였다.

    심심파적으로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칼을 대기 시작했다.

    장무상망,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새긴 네 글자의 인장을

    세한도의 한 귀퉁이에 찍으면서 추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보게 우선! 우리 영원히 잊지 말세! 정말로 고맙네!” 추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12. 중국의 지성인들이 감동받다 1845년(헌종 11년, 60세)

     

    우선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 연경에 가서 추사와 교분이 있거나 흠모하는 학자들을 모아 세한도를 펼쳐 보였다.

    중국 학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깊은 신음소리 같은 탄사가 여기저기 쏟아졌다.

    “추사 선생도 훌륭하고 이상적 당신도 훌륭하오. 이 세한도 또한 세상에 없는 놀라운 보물이오!”

    단번에 13명의 학자들이 제영을 앞 다퉈 썼다.

    참여하지 못한 학자들의 제영도 후에 함께 하게 되어 16명의 제영이 세한도의 뒤를 장식했다.

     

     

    13. 손재형 나라의 보물을 되찾아오다 1944년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지 80여 년 후 우여곡절과 온갖 풍상을 거치며

    세한도는 흘러흘러 후지즈카 경성제국대학교수(1879~1948)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전세가 불리해짐을 깨닫고 고향인 동경으로 돌아가면서 추사 선생의 모든 자료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 소식을 접하고 가장 놀란 사람은 서예가로 명망 높은 손재형(1902~1981)이었다.

    추사 자료의 해외 반출이 안타까웠다.

     

     

    14. 민족의 보물이 불타버릴 뻔하다 1944년

     

    ​“돌려주십시오.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작품입니다. 돈은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세한도 하나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두 달여 무릎 꿇고 끈질기게 간구한 손재형의 손에 드디어 세한도 작품이 돌려졌다.

     “좋소. 당신의 열정이면 이 세한도를 잘 보전하리라 믿소. 조심해서 가지고 가시오. 세상이 온통 포화 속이오!”

    세한도를 받아든 손재형은 벅찬 가슴을 누르고 귀국했다.

    우연일까? 얼마 후 후지즈카 교수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추사의 많은 자료들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5. 잘했구나! 잘했어! 1949년

     

    손재형은 상당 기간 세한도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과 좌우의 분열과 혼란 등이 이유였으리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1949년 애국심이 남다르고

    학문의 세계가 당대 최고였던 정인보, 이시형, 오세창 선생을 찾아가 세한도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발문을 받았다.

    “자네 같은 사람의 애국심 덕택에 우리가 해방되고 독립이 된 것이네. 잘했구나! 잘했어!

     

     

     

     

     

     

     

     

    세한도(歲寒圖)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이다.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趍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 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아!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완당 노인(阮堂老人)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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