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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4. 10. 4. 04:45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국민 가수 배호의 우수에 찬 목소리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낀 장충단 공원으로 널리 회자된 장충단 공원’.

    남산 동쪽 봉우리 종남산(終南山)기슭 아래의 동북쪽 일대는

    예로부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경치 좋은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계곡에는 약 200여년 전인 영조 중엽 이래,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으며,

    지금의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과 성벽이 서로 엇갈리는 곳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그 뒤 1900년에 고종황제가 이 자리에 장충단(奬忠壇)을 꾸미고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되었을 때 순사(殉死)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비롯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일제하에서 경성부가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 짓고,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연못·놀이터·산책로 등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기부터의 일인 것 같고

    그 뒤 그들은 이곳에 상해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등

    일본색을 짙게 하였으나 광복 후에 이런 것은 즉각 철거되었다.

    정부 수립 후 공원 경내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들어섰다.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철거하게 된 수표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1964년에는 이준(李儁)의 동상이,

    1968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1968년에는 아름다운 분수대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공원은 위치 때문에 수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62년 이후로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중앙공무원교육원(그 뒤 동국대학교로 양도

    재향군인회 등이 들어섰으며 그 때마다 공원면적은 축소되었다.

    , 도시계획법상에 근린공원내에 들어갈 수 있는 시설로 되어 있는

    국립극장·국립국악원 등도 들어섰으나 그 뒤 일부 기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1940년 처음 공원이 될 때 418000였던 이 공원은 이렇게 잠식·침식되어,

    1984년에는 면적이 297000로 축소되었다.

    , 이상의 시설 이외에도 어린이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 등의 체육시설도 있어

    장충단 일대가 지녔던 옛날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그러므로 서울시와 건설부는 장충단공원을 독립된 근린공원으로 존속시킬 경우

    더 많은 시설들이 들어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1984년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 전역을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합병하였다.

    공원 주변에 장충체육관·국립극장 등의 문화시설이 있고, 남산 산록의 아름다운 풍경지로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여 항상 소풍 및 산책하는 시민들로 성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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