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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준하공원과 장준하선생 묘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5. 6. 21. 20:02

    장준하공원과 장준하선생 묘

     

    파주시에서 탄현면 성동리 688번지에 3967㎡(약 1200평) 규모로 조성되는 장준하 선생 추모공원에는

    유골을 안장한 추모대와 길이 40m, 높이 50cm~2.8m에 이르는 추모벽이 만들어졌다.

    추모벽은 선생의 높은 뜻과 희생정신을 백두대간으로 형상화했다.

    또한 좌우로 나누어진 추모벽 정중앙에 선생의 고행과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 요소인

    '돌베개'를 놓고 분단된 산맥을 하나로 이어 선생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좌측벽에는 출생부터 영면에 이르기까지 연보(年譜)를, 우측벽에는 대표적인 저서 '돌베개'와

    당대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던 '사상계'에 대한 소개, 그리고 선생의 어록과 추모글 등을 수록했다.

    장준하추모공원은 2012년 8월 제막식과 37주기 추도식을 겸해 문을 열었다.

     

     

     

     

     

     

     

     

     

     

     

    장준하(張俊河, 1918∼1975)

     

    본관은 안동(安東) 평안북도 선천 출생. 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가·민주화운동가.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張錫仁)이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쓰저우(徐州, 서주)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해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1월 충칭(重慶,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하고, 곧바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특히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특파되었으나 작전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광복 이후 잡지『사상계(思想界)』를 간행하였고,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옥중 당선으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생애와 활동사항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대학) 예과를 거쳐 도쿄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 일본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金俊燁)의 도움으로

    중국 린취안(臨泉, 임천)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린취안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약칭 한광반)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여가를 이용해 잡지『등불』을 발간했다. 한광반의 훈련에 한계를 느끼고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2개월간 혹한, 배고픔과 사투를 벌인 끝에

    1945년 1월 30일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도착 후 시안(西安, 서안)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李範奭) 휘하에 배속되었고,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區司令部) 웨드마이어(Wedemeyer, A. C.) 휘하에서

    미국 전략사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특히 국내의 후방에 침투할 목적으로 조직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에 자원해

    수송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한편 이곳에서도 교포들의 친목잡지인『제단(祭壇)』초판 300부를 발간했다.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이 되었으나,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사상』을 창간했다.

    이어 1953년 피난지에서 무일푼으로『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연이은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藥師峰)에서 등산에 나섰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사망 경위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기록 폐기, 수사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그의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기념사업회는 매년 1∼2회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따라 가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행사를 열고 있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12년 8월 파주시가 추모공원으로 조성한 통일공원으로 옮겨졌다.

     

     

     

    장준하공원을 만들며...

     

    파주는 항전의 땅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사투가 있었고,

    근래 6.25전쟁에서도 자유를 수호한 도시입니다.

    분단의 역사, 접경도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온몸을 불살랐으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에 헌신했습니다.

    일본에 뺏긴 나라를 되찾고자 구국 장정의 길에 올랐던 장준하 선생은 굳은 의지를 파주에 다시금 살립니다.

    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았음을 파주에서 가르치고 일깨워 나가겠습니다.

    연고도 없이 묻혀 계셨던 파주 광탄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이곳 통일동산으로 오신 이유는

    수많은 호국영령이 선생의 안타까운 영혼을 부른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장준하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 의로운 기상은 우리 파주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40만 파주시민과 이인재 파주시장 -

     

     

     

    공원조성 취지문

     

    여기, 자유로 가는 길, 통일로 가는 길목,

    우리는 겨레와 나라의 자유와 통일을 찾는 길 위에서 일생을 바친 장준하 선생과 함께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자 사상계 발행인, 국회의원, 민주통일운동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선생님, 황토의 유택은 님을 흠모하는 우리들 마음을 시리게 했습니다.

    이제 통일을 염원하는 파주시민을 비롯한 이 땅의 민초들이 뜻을 모아 장준하 선생 영생의 터를 통일동산으로 모셔 왔습니다.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혼, 민족혼, 민주혼은 만민이 우러러 함께 지켜나갈 정신입니다.

    암울한 시대, 온몸을 던져 지성과 사상을 계발한 개척혼과 이를 실천한 용기와 성실,

    강인함과 헌신을 배우고 꿈꾸면서 우리 모두 자유와 통일의 대해로 나아갑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 바다로 흘러드는 이곳, 민주. 통일의 숭고한 뜻이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201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으며

     

    장준하 선생 추모공원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장호권, 이경형 등

     

     

    돌베개와 사상계

     

    장준하의 저서 “돌베개”는 학도병으로 끌려간 날부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책으로

    1971년 5월 20일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다음은 “돌베개”에 부치는 말이다.

    ...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부터 조국광복이란 감격의 깃발이 민족의 숨결처럼 펄럭이던

    1945년까지 나의 20대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으로 부끄러울 것 없는 젊음을 구가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고 또 한두 해가 얹혔다. 그리고 나도 50대에 들어섰다.

    이제 나는 그 2년간의 체험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증언자가 되고자 이 수기를 발표한다.

    당시 국내외를 통한 제반 사정과 우리 젊은이들의 저항을 내 눈으로 확인한 대로 기록해야 하겠다는

    사명감까지도 느끼게 되는 오늘날의 정치현실은 나로 하여금 주저 없이 붓을 들게 했다.

     

     

    사상계(思想界)

     

    사상계는 19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였던 “사상(思想)”에서 출발하였다.

    “사상”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던 장준하가 1953년 4월에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思想界)”로 바꾸고 월간종합교양지를 창간했다.

    창간호 3천부가 발간되고 최고 발행부수가 10만부에 이르는 등 지식인층과 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족통일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 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정치 탄압의 수난을 당하였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실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로 명맥이 끊겼다.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돌베개 중에서 -

     

     

    장준하선생지묘(張俊河先生之墓)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 출생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 약사봉 별세

     

     

     

    사상계(思想界) 비문(碑文)

     

    진정(眞正)한 민주주의사회(民主主義社會)를 이룩하기 위하여,

    子孫萬代에 누를 끼치는 못난 祖上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至誠一貫) 용왕매진(勇往邁進)하자.

     

    - 장준하(張俊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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