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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5. 9. 9. 06:34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최초의 애국, 애족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8.15광복절과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경제난 극복과

    도심지내 녹지공간 확보로 시민의 안락한 휴식과 문화 활동공간 제공을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국채보상운동이란?

     

    1907년 정미면 일제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빚을 지게하여 탄압하자

    서상돈과 김광제의 주도하에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부녀자들은 패물을 파는 등

    1,300만원의 나라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운동이다.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취지문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시민이 충(忠)으로 행하고 의(義)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구주(歐州)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 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근세 역사를 보건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진멸한 이집트나 월남 폴란드 등의 국민은

    모두가 단지 자기 한 몸과 자기집만을 알 뿐 군주나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인 즉,

    이는 자함자멸(自陷自滅)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하여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기를 천만 행심이로다.

     

    설명문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에 보도된 순한문 취지문으로 대구광문회 서상돈 선생의

    국채보상 발의를 2백여 회원의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국채 1천 3백만원 보상 취지문을 작성, 전국 각 도에 공한한 내용임.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항일 독립 운동사에 길이 빛날 구국 정신의 결성이다.

    1907년 1월 29일, 애국 계몽 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일본 차관 1300만원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으니,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과 국토를 보존하자"는 외침에

    200여 회원들은 분발하여 즉각 전국적으로 실행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2월21일 북후정 에서 열린 [국채 보상 대국 군민 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으며,

    남일동에 사는 부인 일곱사람이 패물을 바침으로써 전국여성 국채보상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 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 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 정신은 뒷날 3.1운동과 물산장려 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독립지사, 서상돈(徐相燉, 1850.10.17~1913. 6.30)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이다.

    경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1871년 대구로 가서 지물행상과 포목상등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으나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관하여 한국인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

     

    석람 김광제는 1866(고종3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1888(고종25년)에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되어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를 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905년에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왕궁마저 일본군의 수비를 맡게 되자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분연히 사직하고

    12월에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러나 간계에 몰려 오히려 고군산도로 유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우국충절이 밝혀져 2개월만에 특별사면 되었다.

    1907년 2월 그는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라는 인쇄소겸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출판을 통하여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상이 노골화되자 1907년 서상돈(徐相敦) 등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를 조직하였으며,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禁煙)한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

     

     

     

     

     

     

     

     

     

    겨레의 밭 /유치환

    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
    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이루어지나니
    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國債報償運動 女性記念碑)

     

    경고(敬告) 아(我) 부인동포라.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三從之道)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흥감케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물론 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리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일신소존(一身所存)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河海)가 가는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유지하신 부인동포들은 다소를 물구(物拘)하고 혈심의연(血心義捐) 하와 국채를 청장(淸帳) 하심이 천만행심(千萬幸甚)

     

    정미 정월 십일일

    발기인에 대구 동상 남일동

     

    정운갑 모 서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서병규 처 정씨 은장도 일개 두냥중

    정운하 처 김씨 은지환 일불 한냥 구돈중

    서학균 처 정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서석균 처 최씨 은지환 일불 한냥 오돈중

    서덕균 처 리씨 은지환 일불 한냥 오돈중 은가지 삼개

    김수원 처 배씨 은연화 일개 두냥 구돈중

     

     

    건립문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눈부시었다.

    여학생은 물론 가정의 부인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성 못지않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지금까지 역사의 뒷면에 있던 여성들이 나라의 위기에 당면하여 역사의 전면에 뛰쳐나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남일동 7부인회는 비녀와 반지를 뽑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석을 국채보상금으로 헌납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로써 한국 근대 여성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의 전형이 된 것이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여기 남일동 폐물폐지부인회의 “경고 아 부인동포라”라는 역사적인 격문과 함께

    전국 28개 여성국채보상운동단체의 이름을 돌에 새겨 청사에 길이 남긴다.

     

    2006년 2월 21일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김영호

     

     

     

     

    달구벌 대종

     

     

     

    달구벌 대종은 향토의 얼과 정서가 담긴 맑고 밝은 소리가 울려 만인의 기상을 일깨우고,

     

    화합과 번영을 염원하는 대구시민의 뜻을 온누리에 알리고자

     

    1998년 12월 대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내에 건조 설치하였다.

     

     

    달구벌 대종은 6,000관(22.5톤)의 청동을 사용하여 1998년 6월 1일부터 11월 28일까지 주조했고,

     

     

    종각은 건축면적 77.2m²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전통한식 목구조로 1998년 6월1일부터 착공하여 12월21일에 준공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 골목투어 4코스, 근대路 여행 삼덕봉산문화길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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