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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5. 10. 12. 06:14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

     

     

    동국사(東國寺)는 한일병합 1년 전(隆熙 3년)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찌다(內田佛觀) 스님이

    일조통(一條通)에서 금강선사(錦江禪寺)란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하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재)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고

    당시 전북종무원장 김남곡 스님(1913~1983)이 동국사로 개명하고,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양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 건축양식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지붕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외벽에는 미서기문이 많으며,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는 대조를 이룬다.

    요사는 몸채를 퇴간으로 둘러싸는 일본 전통양식이고, 복도를 통해 법당과 요사가 연결되어 있다.

    사용된 목재는 모두 일본산 쓰기목(삼나무)이다.

    범종은 일본 경도에서 주조하였고 창건주 및 개산, 시주자, 축원문은 음각되어 있다.

    동국사는 한국 개화기와 근대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써 식민지배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높다.

     

     

     

    대한불교조계종 월명산동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동국사

     

     

    등록문화재 제64호 동국사(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동국사 입구에 음각으로 새겨진 노희윤(盧熙潤).

     

     

     

     

     

    동국사 주련

     

    阿彌陀佛眞金色(아미타불진금색) 아미타 부처님의 참된 금빛 몸이여

    相好端嚴無等倫(상호단엄무등륜) 상호가 단정하고 엄숙함은 비할 바 없네

    白毫宛轉五須彌(백호완전오수미) 백호는 완전하여 다섯 수미산을 합한 것 같고

    紺目澄淸四大海(감목징청사대해) 푸른 눈의 맑기는 큰 바다와 같네

    光中化佛無數億(광중화불무수억) 원광 속에는 또 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고

    化菩薩衆亦無邊(화보살중역무변) 화현한 보살들의 모습도 끝없이 많구나

     

     

    阿彌陀佛眞金色(아미타불진금색) 아미타 부처님의 참된 금빛 몸이여

     

     

    相好端嚴無等倫(상호단엄무등륜) 상호가 단정하고 엄숙함은 비할 바 없네

     

     

    白毫宛轉五須彌(백호완전오수미) 백호는 완전하여 다섯 수미산을 합한 것 같고

     

     

    紺目澄淸四大海(감목징청사대해) 푸른 눈의 맑기는 큰 바다와 같네

     

     

    光中化佛無數億(광중화불무수억) 원광 속에는 또 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고

     

     

    化菩薩衆亦無邊(화보살중역무변) 화현한 보살들의 모습도 끝없이 많구나

     

     

     

     

     

     

     

    懺謝文(참사문)

     

    참회(懺悔)와 사죄(謝罪)의 글

     

    우리 조동종(曹洞宗)은 메이지 정권 이후 태평양전쟁의 종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에서

    해외 개교(開敎)라는 미명하에 당시 정치권력의 아시아 지배 야망에 가담, 영합하여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습니다.

    또한 탈아입구(脫亞入歐)하에, 아시아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멸시하고 일본의 국체와 불교에 대한 우월감으로

    일본의 문화를 강요하고, 민족의 긍지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를 해왔습니다.

    게다가 불교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행위를 석가모니 세존과 삼국전등(三國傳燈)의 역대 조사의 이름으로 행해 왔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해외전도(海外傳道)의 역사 위에 저질러 온 중대한 죄(過ち : 잘못,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아시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心からなる) 사죄(謝罪)를 행하고 참회(懺悔)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껏 해외전도를 종사해 온 사람들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일본의 해외 침략에 갈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해 온 종문(宗門)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동종이 1980년에 출판한 책인 <조동종 해외개교 전도의 역사(曹洞宗 海外開敎 傳道史)>가 과거의 죄에 대해

    반성이 결여된 상태로 발간되었고, 게다가 책의 본문에는 과거의 잘못을 긍정할 뿐 아니라 때로는 미화하거나 찬탄하며,

    피해를 당한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도 배려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말한 것, 게다가 과거의 망령과 같은, 그리고 근대 일본의 오욕이라고 해야 할

    황국사관을 긍정하는 듯한 시각으로 집필 출판되었던 것을 수치로 생각합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서적이 태평양전쟁 후 35년이 경과한 뒤에 출판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문이 메이지 시대 이후, 어떤 때는 국가에 아첨, 영합하고,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국가 정책(國策)에 가담하여

    전쟁에 협력하면서 아시아 민중에게 도탄과 고통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없었고,

    그 책임조차도 느끼지 못해 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카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했으나,

    유감스럽게 우리 종문은 이러한 대화 노력을 게을리 했습니다.

    리고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를 묻고,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면서

    자신의 좌표축을 규명하려는 자세를 갖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945년 패전 직후에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전쟁 책임’에 대한 자기 비판을 게을리 한 것입니다.

    조동종이 늦었다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그 태만함을 사죄하고 전쟁 협력의 사실을 인정하며 사죄합니다.

    우리는 ‘전쟁 책임’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아시아 사람들의 고통 위에 서서

    1985년 2월 이후 <조동종 해외개교 전도역사> 책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철저한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 곳곳에 ‘민족 차별에 의한 차별적 표현’, ‘국책인 황민화 정책에 가담한 사실에 반성이 없는 표현’이 보이고,

    이 책이 역사의 기록으로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일 뿐 아니라,

    억압받은 사람들의 인권의 관점이 결여되었으며, 인권옹호를 추진하려는 우리 종문의 입장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이 책을 회수하여 폐기처분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책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차별적 표현을 지적했지만,

    그 지적은 이 책의 오류를 지탄(指彈)하는 것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반성을 게을리 하고,

    전쟁책임을 회피해 온 우리 종문과 전 종문 사람들에게 향해야 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불교는​​ 모든 인간이 불제자(佛子)로서 평등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에게 훼손(毁損)을 당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런데 그 석존의 법맥을 지켜나가는 것(嗣受)을 신앙의 귀추(歸趨)로 하는 우리 종문이,

    아시아의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전쟁을 성전으로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일본은 황후 암살이라는 폭거(暴挙)를 저지르고,

    조선을 속국화하여 결국 한일합방으로 한 국가와 민족을 말살(抹殺)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조선민족의 일본 동화를 도모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때,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 어딘가 귀속되기를 원합니다.

    가족, 언어, 민족, 국가, 국토, 문화, 신앙 등 자신이 귀속되는 곳의 정체성이 보장될 때, 사람은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정체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민화 정책은 조선 민족의 국가를 빼앗고,

    언어를 빼앗고, 창씨개명이라는 민족문화에 뿌리를 둔 개인의 이름까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조동종을 비롯한 일본의 종교는 그 만행을 종교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종문은 중국 등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선무공작(宣撫工作)을 담당하고,

    그 중에는 솔선하여 특무기관에 접촉, 스파이 활동을 벌인 승려도 있었습니다.

    불교를 국가 정책이라는 세속법에 예속시키고, 더욱이 다른 민족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빼앗아 버리는 이중의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맹세합니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사람은 누구라도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거나 박해받는 일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둘도 없는 존재로서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민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람과 민족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로서 타인의 침해를 거부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개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국가도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통신과 교통기술이 진보하고 지구는 좁아져 정치와 경제가 국제화된 오늘,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임이 분명해졌습니다.

    불교가 말한 모든 존재가 ‘연기’된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도, 국가도, 민족도, 그것이 ‘연기’적 존재로서 타인과 상호의존성 속에 존재한다면, 타인을 침해하는 것은,

    곧 자기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다른 존재와의 공생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타인과의 공존이야말로 자신이 생존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다스리며,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타인과 더불어 함께 배우며 사는 삶이야말로 불교의 평화사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관점을 놓치고, 불교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의 사상, 어느 하나의 신앙이, 비록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비록 어느 정도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타인과의 공생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상을 거부하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은, 그것들을 넘어 훨씬 더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과거 일본의 압정(壓政)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에게 깊이 사죄하며, 권력에 가담하여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개교(開敎)에 임했던 조동종의 해외 전도의 잘못을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1992년 11월 20일 曹洞宗 宗務總長 大竹明彦

     

     

     

     

     

     

     

     

    종각 주변에 있는 여러 모양의 석불상 32관세음석불상과 12지수본존.

     

     

    군산 평화의 소녀상(群山 平和의 少女像)

     

    일제치하에서 일제가 우리의 청순가련한 소녀들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끌고가 종군 위안부로 삼아 짓밟고 신고의 고통속에 살게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이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여 인식하고 후대에 알리기 위해

    끌려간 소녀가 위안부의 삶의 고통속에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리운 내 부모 내 형제가 사는 조국을 향해

    해안가에 서서 처연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며 상념하는 소녀상을 표현하였다.(조각: 고광국)

     

     

     

     

     

     

     

     

     

     

     

     

     

     

     

     

     

    동국사(東國寺)의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曹洞宗) 사찰이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大谷派)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一蓮宗)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同化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본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內田佛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지역을 순석(巡錫)하다가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단기간에 본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檀家)에서 많은 시주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사에 등록된 단도(檀徒)로는 대지주였던 궁기가태랑(宮崎佳太郞)과

    웅본이평(熊本梨平)을 비롯하여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하전길태랑(下田吉太郞) 등이 있었다.

     

     

     

    동국사 창건의 역사적 배경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韓日合邦) 1년 전인 1909년

    일본 승려(僧侶) 선응불관(善應佛觀)스님에 의해 창건(創建)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1897-1910  순종,隆熙.3)과 일제 식민지시대(1910.8.29~1945.8.15)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9년(己酉, 불기2453년, 단기4242년, 대한제국 순종隆熙.3년)은 일본 년 호로 명치(明治)42년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勝利)하였고,

    1909년 7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해이며,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暗殺)한 해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병합(倂合)의 추진이 가속화되던 때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庚戌國恥)이 맺어지면서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45년까지 36년간의 고통어린 식민지배(植民支配)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爭奪戰)의 일환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 측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삼아 공식적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덴노(명치천황.明治天皇) 시대의 과두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조선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 하던 시기다.

    이렇게 볼 때 동국사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합방에 앞서

    그들의 국교이다시피 숭상되고 있는  불교를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왜색불교를 전파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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