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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5. 10. 31. 05:30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함양 용추계곡 가는 길목에 위치한 연암물레방아공원

    연암 박지원 선생이 중국에서 최초로 들여온 곳이 함양이기 때문에 수식어 가운데 '물레방아 고장'이라고도 한다.

    1780년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선생은

    열하일기를 통해 물레방아를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1792년 연암 박지원 선생이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이곳에서 실용화했다고 한다.

    그 당시 양반사회로 사회의 변화를 도모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할 시기이지만

    지역민의 편의 도모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실용화하게 된 것이다.

    물레방아에 대한 인식은 노래로서 구전되어 오는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 서방님은 날 안고 돈다”는 함양아리랑 노래의 일부에서도 물레방아를 들을 수 있다.

    물레방아공원에는 10m크기의 대형 물레방아와 방앗간, 산책로와 휴게용 정자 등이 있다.

     

     

     

     

     

     

     

     

    연암 박지원(燕岩 朴趾源) 동상, 1737~1805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 낳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고 영민했고,

    아버지가 벼슬이 없는 선비였기 때문에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52년 결혼한 박지원은 처삼촌인 이양천에게서 [사기]등

    역사서적을 중심으로 수년 간 학문과 문장 쓰는 법을 익혔다.

    1765년 과거에 실패한 뒤 오직 학문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를 가지기도 하고,

    특히 이 시기에 박지원은 이덕무, 홍대용 등과 실학에 대하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벌이고, 이덕무 유득공 등과는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1777(정조1)세도 정치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 하였고,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연암(燕巖)” 이라 하였다.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척 박명원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열하일기]를 썼다.

    열하일기에서 정치, 군사,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하였는데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용후생에 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열하일기로 명성을 떨치긴 했지만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뒤 박지원은 1786년 뒤늦게 관직에 나가게 되는데

    면천 군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개혁을 위한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과농소초],[한민명전]을 썻다.

    또한 박지원은 허생전, 양반전, 예덕선생전, 호질 등

    10여 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는데, 이 소설들을 통해서 주로 당시의

    무능한 양반과 부패한 관리들을 특유의 해학으로 예리하게 풍자 하였다.

     

     

     

    燕岩 朴趾源先生 實績碑(연암 박지원선생 실적비) 

     

    연암 박지원 선생은 十八(십팔)세기 북학파 실학의 중심인물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실사구시의 경제학에 통달하여 투철한 비판정신으로

    선진문물과 기술의 과감한 수용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의 창조적 역동적 발전에 기여코자 하는 뜻을 이 고장에 와서 펼쳤다.

    선생은 一七三七(일칠삼칠)년 서울 서대문 야동에서 반남 박씨 사유(師兪)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소년시절을 거쳐

    一七八○(일칠팔공)년 사은사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선진문물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一七九二(일칠구이)년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동안 치민(治民)의 과정에서 쓴 40여 편의 주옥 같은 글이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함양의 서정과 관아 부속건물명, 아름다운 산수 등을 제재로 문학의 꽃을 피웠고

    특히 열하일기는 선생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어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권위주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보수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봉건적인 속박을 탈피해서 농, 공, 상업을 발전시켜

    민중들이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것을 주장하는 혁명적인 사상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경세제민 이용후생을 중시하여 연구해 온 과학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시켜 풍구,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風具織機龍尾水轉輪輾(풍구직기용미수전륜전)등 새 동력기를 제작 사용케 했으며

    새로운 토목기술을 가르쳐 관아의 부속건물을 지었다.

    민생에 힘써 기민구휼(飢民救恤)과 수해방지용 제방축조로 농정에 안정을 기했고까다로운 옥사(獄事)를 현명하게 해결하였다.

    문헌발굴로 학술을 진작시키고 선현들의 유제(遺制)와 경로사상 미풍양속을 몸소 실천하면서

    백성들에게 권장하여 양질의 삶과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서기 2007년 9월

     

    함 양 군 수

     

     

     

     

     

     

     

     

     

     

     

     

     

     

     

     

    물레방아 시원지 복원기

     

     

     

    물레방아는 1780년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당시 청나라)을 다녀 온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선생이

     

    중국의 사상과 문물에 관해 쓴 열하일기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물레방아는 연암 선생이 1792년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임(1792~1797)하면서

     

    織機(직기, 베틀), 風具(풍구), 龍尾(용미, 인력 양수기) 등의 농기구들과 함께 만들면서 실용화되었습니다.

     

    이 지방 노인들의 고증에 의하면 당시 최초의 물레방아가 만들어진 곳이 안심마을 근처라고 합니다.

     

    물레방아는 평화롭고 넉넉한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제민(經世濟民),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요약할 수 있는 현실 개혁적 실학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에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라는 민요가락처럼

     

    푸른 산 맑은 물의 아름다운 고장 우리 함양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군민의 의지를 담아

     

    당대의 문필가요 농경문화 변혁의 선구자였던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오늘날 농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정신적 지표로 삼고자 여기 용추계곡 입구에 물레방아 시원지를 복원합니다.

     

     

    2004년 6월

     

    함 양 군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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