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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與猶堂)”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5. 11. 4. 05:19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與猶堂)”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유실 된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집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인 여유(與猶)는 1800년(정조 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老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씨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 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 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서 써가지고 문미(門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이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배경 설명)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였는데, 이 무렵 정조는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일이었고  곧 판서가 되고 제 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이 시간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방법이 없자,  형 약전을 공격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가족이 관직을 물러나면 다른 가족도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를 올려 관직을 그만 두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수 없이 그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00년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다.

    그 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 두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쌓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경기도 광주(廣주)출신(현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으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輿猶)이다.

    정조(正祖) 13년(17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뒤 검열(檢閱), 승지(承旨), 병조참의(兵曺參議)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순조(純祖) 1년(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된 후, 그해 다시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져 18년간의 귀양살이를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왕도론(王道論)을 통한  균민정치(均民政治), 토지제도로써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했고

    기중가설(起重架設)을 지어 화성(華城)축조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저서로는 목민김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여권이 있으며

    특히 목민심서는 지방수령(首領)의 치민(治민)에 관한 도리를 논한 것으로써,

    오늘날 공직자를 비롯한 모든 공인들에게 덕목(德目)으로 여겨져 올뿐 아니라

    한국 근세의 사회 경제사(經濟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있다.

    1836년 2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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