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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 조병옥박사 생가(維石 趙炳玉 博士 生家)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2. 27. 19:56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維石 趙炳玉 博士 生家)
이곳은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유석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초가였던 생가가 이후 와가로 변형된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대지 550평에 안채 15평, 부속사7평, 일자형 초가로 원형 복원하였다.
조병옥 박사는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한국전쟁 때 내무부장관, 이어 제3.4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960년2월15일 불의의 신병으로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으며
그 공적을 길이 선양하고 후세에 본받을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261-6)
조병옥(趙炳玉)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한인회·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신간회 창립위원·재정총무를 역임.
광복을 맞이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
본관 한양(漢陽). 호 유석(維石). 충남 천안 출생. 공주영명학교를 거쳐 1911년 평양숭실학교를 졸업, 1914년 연희전문을 졸업,
곧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니아주(州) 킹스턴의 와이오밍고교에 입학, 1918년 졸업.
이어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 독립운동,
1925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YMCA 이사와 비밀독립단체 그리스도신우회 회원이 되고,
1927년 신간회 창립위원·재정총무를 역임.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검거되어 3년간 복역.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 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2년간 투옥.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송진우·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1948년 대통령특사·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
1950년 6·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
그 후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직,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야당을 지도.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가료 중 병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한편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의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일제 말기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창립연설을 한 사실과 광복 후 군정청 경무부장 시절 친일파 경찰을 채용했던 점,
제주 4·3 사건 당시, 과잉 진압했던 점들 들어 그의 친일 의혹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유석 조병옥은 조선왕조의 격랑기였던 고종31년(1894년) 3월 21일에 이곳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 조인원(趙仁元)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공(공)은 191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펜실베니아주 킹스턴시의 와이오밍고등학교에 입학,
19118년에 졸업을 하고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 흥사단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에는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YMCA이사 및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1932년 조선일보사의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냈고 1937년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송진우) 장덕수(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미 군정청의의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힘썼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 유엔한국대표로서 외교구축에 크게 공헌 하였으며 6.25동란 때는 내무부 장관으로
대구 방위전선에서 전투지휘를 하면서 철수하라는 유엔군의 요청을 거부하여 6.25동란의 전환점을 이룩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 1956년에는 민주당 조직에 참가하여 최고 의원이 되고,
1956년에 대표 최고의원에 피선되어 야당을 영도하였으며,
1958년에 다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자유민주주의 실천과 반 독재 민주화 투쟁에 신명을 바쳤다.
1960년 민주당 대표로 출마 하였으나 신병으로 도미, 윌터리드 육군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 되었고 묘소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다.
유석은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정성으로 몸바쳐 불세지공(불세지공)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요,
정치가로서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의회민주주의를 펼치려다
병세 악화로 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우리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단장)을 추서 한바, 천안군에서는 공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본받을 역사의 장으로 삼고자 생각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운다.
1995. 4. 20 천안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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