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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관순열사 생가지(柳寬順烈士 生家地)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2. 29. 05:37

    유관순열사 생가지(柳寬順烈士 生家地) - 사적 제230호


    이곳은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심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끊임없는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고

    열사의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1991년 옜 집터에 생가를 복원정비하였다.

    생가 옆에는 기념비와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유관순기념 기독교 대한감리회 매봉교회




    생가 옆에는 유관순열사가 어려서부터 다녔다는 매봉교회도 있다.

    매봉교회는 1908년 설립되었다가 1919 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핍박을 받아 1932년 폐쇄 되었다가

    1967년 열사의 모교인 이화학당의 창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재건립되었다.

    현재 건물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교회 남부연회의 후원으로 새롭게 지어진 것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1층에는 유관순열사의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유관순열사 생가 관리사(柳寬順烈士 生家 管理舍)


    1919년 4월 1일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이후 유관순 열사의 가족은 거처할 곳 없이 생활하던 중

    정부에서 1977년 본 건물을 한옥으로 건축하여 열사의 가족에게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를 관리하면서 거처하도록 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남동생인 유인석씨의 가족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비어 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1)





    유관순열사 봉화지(柳寬順烈士 烽火址)


    이곳은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하여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안성,진천,연기,청주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 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본 유적지를 깊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게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2월 말일 봉화재를 개최하여 유관순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한다.




    유관순열사 초혼묘(柳寬順烈士 招魂墓)


    초혼묘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헌병에 의해 옥중에서 순국한 열사는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그 곳을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게 되면서 열사의 유택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고 말았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에 이 곳에 초혼묘를 조성하고 육각뿔 형태로 만들어 기도문, 어문록 등의 비문을 적어두었다.







    유관순열사 생가 비문(柳寬順烈士 生家 碑文)


    천 년에나 한 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난 별이 바로 이 곳에 내려와 일천구백이년 양력 십이월 십육일에 유관순으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별처럼 밝고 총명하고 씩씩한 처녀로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교훈 아래

    어려서부터 효성과 신념이 강하였고 형제와 친구에게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성실한 모범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기미년 거국적인 삼일독립운동을 보고 고향에서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지령리로 돌아왔다.

    이십 여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의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이월 그믐날 밤에 관순은 매봉에 올라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양력 사월 일일 정오에 아우내 장터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외치는 수천 명의 만세소리가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천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순의 부모와 수십여 명의 열사들은 즉석에서 저들의 총칼 아래 충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 관순도 체포되어 일본헌병의 손아귀에서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추호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마침내 경성복심법원에서 삼년형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천구백이십년 구월 이십팔일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별은 이 하늘에 떠있어서 영원히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


    서기 일천구백칠십칠년 팔월 일일 세우다.

    박화성 짓고, 이철경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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