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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성지(梨津城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3. 2. 20:07

    이진성지(梨津城址)


    성지란 돌이나 흙으로 일정지역을 보호하고 행정이나 군사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건축물의 터를 말한다. 

    이 성은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침입함을 막기 위하여 해안의 요충지에  방어시설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세워졌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곳이 방어가 특히 중요시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군만호의 책임아래 병선과 수군이 배치되고,

    군량과 무기의 완전과 보관과 인근 주민의 피신처로 성벽이 다시 정비되었다.

    성은 남북이 높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바깥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하였다.

    성안에는 두곳의 샘과 객사. 동헌, 군기고 등의 건물이 외곽으로는 1차적인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을 두었다.

    현재 서문터에는 폭 3m, 높이 5m, 길이 34m의 옹성(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과 문에 사용되었던 초석 2개가 남아있다. 
    이진성지는 전라남도기념물 제120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 












    항일마을 - 북평 이진


    북평 이진마을은 1909년 항일 의병운동과 1930년대 전국 최대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중심 마을이다.

    이진마을 출신인 황두일은 1909년 서남해안에서 활동했던 의병대장 중 한 명이었다.

    황두일을 비롯한 해남의병들은 북평면 성동암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왜군에 밀려 대흥사 심적암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심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의병 대부분은 참사를 당하고 황두일도 이후 사형을 당한다.

    1930년대 북평 이진마을을 중심으로 전국 최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가 구성된다.

    중심 인물은 이진마을 출신인 동경 유학파 김홍배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 완도를 비롯해 10개군에 걸쳐 조직된 당시 최대 규모의 항일조직이었다.

    이진에 있던 사설학원인 동강학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주로 성도암과 심적암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활동은 2년여 만에 막을 내리지만 활동범위가 워낙 넓어 사건 발각 당시 연행된 숫자만도 1000명이 넘었고

    구속된 사람은 57명에 이르렀다. 이진마을은 명량으로 향하던 이순신이 3일간 머문 곳이다.






    이진성(이진성 샘터)


    1597년 8월 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군사의 출입이 비교적 원활한 항구를 찾아 나섰다.

    그곳이 이진 항구였다.

    이순신은 일본을 격파하기 위해 여러차례에 걸친 해상훈련을 전개하였다.

    출전 횟수도 잦았다. 때로는 먼바다까지 출전하는 기동훈련도 감행했다.

    군사들이 배멀미로 홍역을 치르는 치를 정도였다.

    이순신은 이진, 어란포, 벽파진 등을 차례로 순항하며 작전지역을 넓혀 나갔다.

    이진항은 삼도수군통제사 아순신의 부대가 이진성에 주둔하면서 병을 치료하고 해상 작전지역을 넓혀 나갔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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