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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불총림 백양사(古佛叢林 白羊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4. 9. 05:18

    고불총림 백양사(古佛叢林 白羊寺)


    백양사는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의 요람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 곳인 백양사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달려와

    남원, 순창 일대를 거쳐 장성 지역으로 뻗어 내려온 노령산맥의 백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 당시 백암사로 명명됐으며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뒤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 선조7년 환양선사가 백양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이어 1917넌 만암 대종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양사란 이름은 하얀 양을 제도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백양사를 오늘에 있게 한 분은 만암 종헌 대선사로 스님은 30년 가까이 백양사에 주석하시면서 불사에 전력하는 한편

    소실된 강원을 다시 개설하여 600년 강원 전통을 이으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내신 서옹 큰스님께서는 2003년 열반에 드시기 전 까지 운문암 운문선원에 주석 하시면서

    눈 푸른 납자를 제접하며 심혈을 기우려 후진 양성에 전력을 쏟으셨다.

    또한 서옹 큰스님께서 ‘참사람’ 운동을 펼치시어 ‘참사람’ 참선 수련회를 통해서

    백양사를 스님만의 참선 수행 도량이 아니라 재가자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문을 개방하셨다.

    백양사는 예로부터 훌륭한 선지식인 큰스님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양사의 총림선원인 운문암은 ‘북 마하연 남 운문‘이란 말이 나타내듯 남한에서 가장 으뜸가는 참선 도량이다.

    고려 각진국사를 비롯 조선시대 소요, 태능, 편양, 진묵, 연담 스님등 조선 말기 불교를 이끌어 왔던 백파, 학명 스님

    그리고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스님 등 암울했던 일제시대 우리나라 불교법통을 이어온

    고승 대덕스님들이 상주 수행하여온 수행 근본도량으로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는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기도가 영험하여 속발 성취하고 청량한 기운이 샘솟아 정신수양에 가장 좋은 도량이라고 전해 온다.

    백양사 산내 암자로는 참선수행 도량인 운문암과 물외암, 금강대, 청량원,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이 있고

    기도 도량으로 영험있는 약사암과 영천굴이, 서편에 계곡과 산수가 울창하고 빼어난 청류암과 홍련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는 임진란, 정유재란, 갑오농민개혁 때에는 백양사 스님들이 역사와 민중의 고난에 함께해온 전통이 있다.

    또한 백양사를 중창하신 만암스님께서 민족교육의 산실인 광성의숙을 설립하였고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을 설립했으며 해방 후에는 광주 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사회교육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백양사 법계(白羊寺 法界)


    백양사 법계는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석물로 높이 2.5m의 사각 석주가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 서 있다.

    원래 이곳에는 장승이 서 있엇는데 마을 사람들과 백양사 스님들이 1924년 장승을 없애고 법계를 세웠다.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白巖山 古佛叢林 白羊寺)


    고불총림(古佛叢林)의 고불(古佛)이란 '인간의 진면목'을 의미하며

    총림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범어)인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의 음역이며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한다.

    즉,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총림이라 부르는 것이며

    선찰(禪刹)의 경우 이름으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 한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화합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을 林이라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즉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 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5대 총림이 있다.








     

    조선팔경 국립공원 백암산 백양사








     

    백양사(白羊寺) 백학봉(白鶴峰)과 쌍계루(雙溪樓) - 국가지정 명승 제38호


    "백양사 백학봉과 쌍계루"는 1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백양사.

    "대한8경"이라 불리는 연못에 비친 단풍든 백학봉과 쌍계루의 아름다운 경치, 비자나무와 백양꽃 등

    다양한 자연환경을 간직하여 2008년 2월 5일부터 국가에서 명승(名勝)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하얀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의 백학봉은 백양사, 운문암, 약사암, 천진암 등을 품고 있고,

    육당 최남선은 "흰 맛, 날카로운 맛, 신령스러운 맛이 있다."라고 칭찬했다.

    호남지역에 재난이 발생되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 지냈던 국기단(國祈壇)에서

    매년 백양단풍축제 때에 국태민안을 바라는 "백암산 국기제"가 열리고 있다.

    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쌍계루는 고려시대 1350년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세웠으나

    1370년 큰 비로 무너져 1377년 청수(淸叟) 스님이 다시 세우면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기(記)를 쓰고 포은 정몽주가 원운(原韻) 시를 지었다.

    쌍게루에는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사암 박순(思庵 朴淳),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월성 최익현(月城 崔益鉉),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서옹(西翁) 스님, 산암 변시연(汕巖 邊時淵), 약천 조순 등의

    현판 180여 작품이 있으며, 이는 저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스님과 선비들이 소통하고 교류했던 화합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쌍계루는 여러 번 다시짓기를 거치다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85년 복원되었으나 주춧돌이 땅에 묻혀있고 처마가 썩어 2009년 해체해 다시 세워

    지금의 앞면 3칸, 옆면 2칸, 팔작지붕(지붕 옆면이 八자 형태), 2층 누각으로 전해온다.






     

    백양사 사천왕문(白羊寺 四天王門)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백양사 사천왕문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불법을 수호하면서 악귀가 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백양사의 출입문이다.

    지금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송만암 대종사(宋曼庵 大宗師, 1876~1956)가 백양사를 다시 지을 대 건립되었으며,

    1945년 8월 낙성식을 치르고 다음 주에 해방이 되어 “해방 사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지붕 옆면이 人자 형태)으로 중앙 1칸은 문으로 이용되고, 좌우 2칸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내부 천장 중앙은 우물 정(井) 모양이고, 주변은 경사진 빗천장이며, 공포(栱包)는 익공(翼工)과 주심포(柱心包)를 병용한 절충형이다.

     

     오른쪽 칸에는 동쪽을 지키는 파란 얼굴의 지국천왕(指國天王)이 비파를,

    남쪽을 지키는 빨간 얼굴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보검을 들고 잇으며,

    왼쪽 칸에는 하얀 얼굴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용과 여의주를,

    북쪽을 지키는 까만 얼굴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백양사 사천왕문 입구에는 만암대종사고불총림도량(曼庵大宗師古佛叢林道場)이라는 큰 석주가 있는데

    그 밑에 “이 뭣고” 하는 화두가 쓰여 있다.


    이뭣고(是心麽, 시심마)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禪)을 참구(參究) 하는데 의제(疑題)를 하는 것이

    화두(話頭)라 하고 화두(話頭)에는 1,700여 가지가 있다. 

    그 중 유명한 화두(話頭)가 '이뭣고'가 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시심마(是心麽) 

    '부모에게서 태어나기전의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의제(疑題)를 의심(疑心)하기 위하여,

    '이뭣고'하며 골똘히 참구(參究)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참 나(眞我)를 깨달아 생사를 해탈(解脫)하게 된다. 

    본인은 세속적(世俗的)인 호기심(好奇心)과 영적(靈的) 갈망(渴望)으로 감히 고승대덕(高僧大德)이

    참선(參禪)에 드는 흉내를 내고자 '이뭣고'란 카페 당호(堂號)를 쓰게된 연유(緣由)다. 

    이게 무엇인가?



















     

    백양사 대웅전(白羊寺 大雄殿)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백양사 대웅전(白羊寺 大雄殿)은 본존불(本尊佛)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앙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모시고, 다양한 예불과 의식이 치러지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 대종사(宋曼蓭 大宗師)가 여섯번째로 다시 지었다.

    뒤쪽 백학봉의 드센 기운을 막기 위해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지붕 옆면의 八자 형태)으로 높게 지었으며,

    높직한 장대석으로 다듬은 3단의 기단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둥근 기둥을 세웠다.

    내부 천장은 나무 재료가 보이지 않게 우물 정(井) 모양이고 바닥 역시 우물마루이다.

    화려한 단청은 조선후기 불화의 맥을 잇는 보응 스님의 제자 일섭(日燮) 스님이 마지막 작품으로 희귀성이 인정되어 눈길을 많이 끈다.

    특히 천장의 봉황, 용 등의 조각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엄숙하고 위엄있는 천상 세계를 실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팔층석가사리탑(八層釋迦舍利塔)


    백양사 대웅전 뒤에 있는데 8정도를 나타내기 위해 8각 8층으로 만들었으며 1925년에 조성하였다.









     

    오죽(烏竹)-검은 대나무

     

    벼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학명은 Phyllostachys nigra MUNRO.이다.

    중국 원산의 왕대속의 일종이나 전래경로와 연대는 미상이다. 줄기의 색이 검기 때문에 오죽이라 불린다.

    오죽은 품위가 우아하여 관상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토양의 비옥도, 수분을 많이 요구하나

    내한성이 다소 있으므로 우리나라 중부 일부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

    오죽은 방풍림 뿐 아니라 정원이나 공원에도 알맞은 수종이다.

























     

    고불총림 백양사(古佛叢林 白羊寺)


    고불총림 백양사 백양사는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의 요람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 곳인 백양사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내려온 노령산맥의 백암산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 당시 백암산 백암사로 불리었으나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뒤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 선조7년 환양선사가 백양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이어 1917넌 만암 대종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양사란 이름은 하얀 양을 제도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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