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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충사(表忠寺) 효봉대종사사리탑(曉峰大宗師舍利塔)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5. 10. 23:00

    표충사(表忠寺) 효봉대종사사리탑(曉峰大宗師舍利塔)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宗正)을 지내기도 한 효봉(曉峰)스님은

    1966년 10월 15일 표충사의 만일루(萬日樓)에서 앉은 채로 열반에 드셨다.

    다비식에서 수습된 사리(舍利)는 이곳 표충사는 물론 스님이 오래 머물렀던

    송광사(松廣寺), 동화사(棟華寺), 미래사(彌來寺)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속명이 이찬형(李燦亨)인 스님은 1888년 음력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이 고향이며,

    아버지 이병억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14살 때에 평양감사가 개최한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1908년 21세 때에 일본으로 관선유학(官選留學)을 떠나 1913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26살에 귀국하여 1914년 조선인 최초의 판관(判官)이 되어

    함흥과 서울의 지방법원과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10여 년간 판사생활을 한다.

    그의 나이 36살이던 1923년 항소심에서 처음으로 일반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사형은 그대로 집행되었고 그후에 진범이 나타났다.

    동족으로서 민족의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찬형 판사는 인간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자기모순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와 엿장수가 되어 3년 동안 8도를 방랑하였다.

    1926년 나이 38세에 엿판을 짊어지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그는 유점사(楡岾寺)를 거쳐

    신계사 보운암(神溪寺 普雲庵)으로 들어가 석두 보택(石頭 寶澤)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沙彌戒)를 받는다.

    자신을 조실부모한 엿장수로 소개하였으므로 ‘늦깎이 중’ 또는 ‘엿장수 중’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용맹정진을 계속한 끝에 1928년 나이 41세에 깨달음을 얻자 스승 석두는 운봉(雲峰)이라는 법호를 내린다.

    1935년(48세)에 금강산을 떠나 설악산 봉정암(峰頂庵)에서 동산(東山), 청담(靑潭)스님과 안거를 함께하였다.

    1936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한암(漢岩)선사의 인가(印可)를 받고,

    1937년엔 덕숭산 정혜사 선원에서 만공(滿空)선사로부터도 인가를 받는다.

    이렇게 당대 선지식(善知識)의 인가를 두루 받은 후 발길을 남쪽으로 향하였다.

    1938년 때마침 조계산 송광사의 조실로 추대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 동안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 선원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구산(九山)도 여기에서 효봉으로부터 득도 수계(得道 受戒)를 받아 제자가 되었으며,

    훗날 '무소유(無所有)'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법정(法頂)스님 역시 삼일암에서 효봉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법정스님은 효봉의 맏 상좌(上座)이다.  효봉이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게 된 것도 이 때이다.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한지 한 해가 넘은 어느 날 꿈에 보조국사(지눌 知訥)의 16세손 고봉국사(高峰國師)가 나타나

    몽중법문(夢中法門)과 게송 그리고 ‘효봉 학눌(曉峰 學訥)’이라는 법호(法號)를 전한다.

    이로서 '효봉(曉峰)'이라는 이름을 얻고 '효봉대종사(曉峰大宗師)'로 불리게 된다.

    1941년에는 금강산에서 은사 석두(石頭)스님을 송광사 삼일암으로 모셔와 함께 살게 된다.

    해방 이후 1946년 가야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어 송광사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가야산까지 내려오자 가야총림은 해산된다.

    피난길에 나선 효봉대종사는 그해 겨울 부산 금정선원(金井禪院)에 머물다가

    1951년 여름에 배를 타고 전남 대흥사(大興寺)로 향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배 멀미를 심하게 하게 되어 통영에서 내려 미륵도 용화사 도솔암(彌勒島 龍華寺 兜率庵)에 거처를 정한다.

    이때 도솔암에는 제자 구산(九山), 법정(法頂), 탄허(呑虛), 고은(高銀) 등도 함께 머무른다.

    도솔암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1954년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1959년부터 팔공산 동화사(八空山 棟華寺)에 머물며 불교계의 통합에 노력하였으며

    그해 4월 11일 통합된 대한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宗正)에 추대된다.

    1962년에는 제자인 구산(九山)이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스승을 도왔다.

    그후 효봉스님은 통영 미래사와 대구 동화사를 오가며 생활하다, 1966년 5월 13일에 밀양 재약산 표충사로 이주하였다.

    제자 구산스님도 동화사 주지 직을 사직하고 스승과 함께 표충사에 머물며 극진한 효심으로 시봉(侍奉)하였다.

     그해 10월 15일 새벽 3시, 서래각(西來閣)에 머물던 효봉대종사는 문득 제자 구산(九山)스님을 찾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짤막한 문답이 오가고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 오늘 갈란다."
    “예? 스님, 언제 쯤요?”
    “오전에 가지!”
    오전 10시 정각, 새벽 3시부터 줄곧 가부좌로 앉아 계시던 스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더니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 졌다.

    선정삼매(禪定三昧)속에 정진하던 그대로 입적한 것이다.

    재약산 계곡에는 스님의 열반(涅槃)을 알리는 108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적 3일 전인 10월 12일, 속가의 장손(長孫) 이인목(李仁穆)과 그의 가족들이 우연히 신문기사를 보고 표충사로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이것이 출가 후 처음이자 마지막 혈육의 상봉이었다.


    =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구천리) 표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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