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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석각(海雲臺 石刻)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5. 4. 23:30
해운대 석각(海雲臺 石刻)
이 석각은 신라 말의 대시인이자 대학자였던 문창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어려운 정국을 떠나 가야산 입산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자연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대(臺)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소요(消遙)하다가 선생의 자 이기도한
해운을 암석에 『해운대(海雲臺)』란 세글자로 음각하였다는 데서 이곳의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석각에 새겨진 해운대란 각자가 최치원의 자필이라고 할 만한 확실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말 문호인 정포(鄭誧,1309 ∼1345)의 시 가운데 “대(臺)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아있구려” 라는 구절을 볼 때, 그 이전부터 동백섬에 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동백섬 남쪽 끝 부분 바다와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 해안의 바위 위에 음각되어 있으며,오랜 세월동안 비바람과 파도에 씻겨 지금은 세글자 중 운(雲)자 가 많이 마모된 상태로 남아있다.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5호로 관리하고 있다.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710-1 (동백섬) =최치원(崔致遠, 857~? 고운 孤雲, 해운 海雲)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아버지는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때에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肩逸)이다.
자(字)는 홍운(弘雲), 해운(海雲), 해부(海夫) 등이고, 호(號)는 유선(儒仙), 고운(孤雲) 등이다.
최치원은 857년(신라 헌안왕 1)에 태어났는데, 군산시 내초도동에서 출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은 금빛이 나는 돼지(金豚)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내초도동에는 ‘금도시굴’ 내지는 ‘금도치 구녁’이라 불리는 굴이 아직도 있는데,
‘금도시굴’은 ‘금돈시굴(金豚始窟)’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금돈시굴’ 설화에 의해 옥구 지방에서는 경주 최씨를 ‘돼지 최씨’로 부르기도 한다.
48대 경문왕(景文王)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낙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 쓰는 데만 몰두하여
5수(首) 1권(卷)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다.
876년에는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현위(縣尉)를 지냈으며,
이 무렵 1부(部)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다.
최치원이 머물고 있을 당시 당(唐)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黃巢)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고변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表)·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다.
그리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다시 하사 받았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최치원이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헌강왕(憲康王)은 최치원을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 학사(翰林學士) 수병부 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 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고,
당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저술 가운데 『중산 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등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州)와 군(郡)에서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 여왕(眞聖女王)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각하였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 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 여왕은 최치원을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 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최치원은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비롯되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에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글을
왕건에 보내어 고려의 건국을 암암리에 도와준 공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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