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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 장군 묘(金德齡 將軍 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6. 1. 22:58

    김덕령 장군 묘(金德齡 將軍 墓)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소는 충장사(忠壯祠) 북쪽 구릉지대에 있다.

    묘소는 1974년 11월 9일 원래의 자리에서 정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다.

    원 묘는 목관(木棺)을 안치한 뒤 삼물회(三物灰)로 쌓은 회격묘(灰隔墓)이었다.

    관(棺)내에서는 이장시 입었던 수의(壽衣, 민속자료 11호)와 육탈(肉脫)이 안된 뼈가 그대로 출토되었다.


    =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 충장사 =
















    김덕령장군


    김덕령(金德齡 1567~1596) :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광주(光州)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 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반란이 진압되자 중도에 회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 구금된후,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義烈祠)에 형 덕홍(德弘). 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으며, 전기(傳記)소설인《김덕령전》이 전하여 온다.




    김덕령 연보


    김덕령 조선 의병장이 되다.

    1568(1세)12.29일 광주 석저촌에서 3남3녀중 둘째 아들로 출생.

    1571(4세)종조부 사촌 김윤제로부터 글공부 시작. 1572(5세)종조부 사촌 김윤제 사망.

    1581(14세)아버지 봉변 사망. 1585(18세)흥양이씨 와 혼인 1587(20세)우계 성훈의 문하에서 수학.

    1592(25세)6월 5일 형 덕홍과 의병에 참여.6월 병환중인 어머니 봉양을 위해 돌아가라는 형의 권유로 귀향.
    7월 10일 형 덕홍, 고경명과 금산전투에서 순절. 1593(26세)어머니 반씨부인 사망.
    10월 27일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 에게 글을 올려 의병장으로 천거
    11월 : 자형 김응회, 동생 김덕보 그리고 송재민이 충과 효 사이에서 고민하는 덕령에게 거병을 권유.
    전라관찰사 이정암 덕령에게 거병 권유, 묵최로서 계의의병으로 나설 것을 결심하고 거병.
    약 3천의 의병을 모아 도원수 권율에 보고하고, 권율로부터‘초승군’이라는 표장을 받다.
    1593.12.13.전라관찰사 이정암이 덕령을 의병장으로 발탁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

    1593.12.22.분조인 세자를 삼례에서 만나다.

    12.25.세자로부터‘익호장군’이란 군호를 받다. 12.27.전주 무과시험장에서 시범을 보이다.

    1594.1.1.선조로부터‘충용군’이라는 군호를 받다. 1594.1.5선전관과 형조좌랑(정6품)에 임명됨.

    1594.2월고성, 창원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1594.4.1.특명으로 각 도의 의병을 혁파하고 김덕령에게 예속시킴에 따라 전국 의병의 총수가 되다.

    1594.8월고성지방에서 노략질하는 왜군을 물리치다.

    1594.9.26.~10.7수륙 연합작전인 ‘거제 장문도해전’에 이순신, 원균, 곽재우와 참전.

    1595 3월왜병을 정암 아래에서 크게 섬멸하다.


    사면과 복권 그리고 선양
    1661.8.30.(현종2년)김덕령 장군을 신원 시키고 복권하도록 명하다.

    1668.4.17.(현종9년)병조 참의에 증지고디다.하서 김인후(이조판서), 수은 강황(병조참의)도 함께 증직
    ▶ 현종 즉위년부터 11년 12년 정점(경시 1근)으로 가뭄,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 됐는데 그에 따른 호남민심 달래기가 아닐까?

    1678.3.1.(숙종4년)회재 박광옥과 함께 벽진서원에 합향.

    1680.8.24.(숙종6년)왕명으로 사액. 10.15 병조판서로 가증. 1681(숙종7년)액호를 의열사로 바꾸다.

    1785.9.8.(정조9년)특명으로 시호를 의논케 하다. 덕홍은 지평, 덕보는 집의를 증직.

    1788.4.6.(정조12년)충장 이란 시호를 주다. 11.16김덕령과 흥양이씨의 정려비를 세우게 하고 석저촌의 이름을 충효리로 하사하다.

    1789.1.14.(정조13년)종1품 좌찬성에 가증되다.(흥양이씨는 정경부인)

    1791.4.26.(정조15년)「김충장 공유사」를 다시편집, 간행토록 하다.

    1971년 4월‘충장공 김덕령 장군 사우 복원사업 추진위원회’구성.

    .4.4.충장사 기공식. 11.26지금의 자리로 이장(11.19 파묘)

    1975.4.27.준공식(6천여명). 총사업비 1억 3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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