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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묘(金庾信墓) - 사적 제21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8. 2. 04:30

    김유신 묘(金庾信 墓) - 사적 제21

     

    이곳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명장(名將) 신라 김유신장군의 묘이다.

    김유신 장군은 금관가야국(金冠伽倻國)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花郞)이 되고

    35세 때에는 아버지 서현(舒玄)장군과 함께 고구려(高句麗)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은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이 되게 하고 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660)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百濟)를 공격할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장군(階伯將軍)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黃山伐)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겼으며

    문무왕(文武王) 8(668)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수 하였다.

    무공을 세운 장군은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은 장군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墓)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대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大王陵)

     

    비석 아랫부분에 물을 뿌리면 ""자 뒤에 "" 자가 보이기도 한다

     


     

    경주의 김유신묘의 호석(護石)에는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띠동 물인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십이지신은 쥐, , 호랑이, 토끼, , , , , 원숭이, , , 돼지 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능을 지키는 수호신인 십이지신의 경우 동물의 얼굴에 사람 몸을 하고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모습으로 만들어지나 특이하게도 김유신묘의 호석의 경우에는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든 모습이다.

    동물의 특징을 잘 살리기 위해 고개를 돌려 옆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김유신[金庾信, 興武大王,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대신(大臣).

    증조부는 532(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숙흘종이 만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만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는 이 무렵까지도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이 혼인의 결과는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가을로 국가에서 향()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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