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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임란의사추모탑(慶州壬亂義士追慕塔)
    국내 나들이/탑(塔) 2016. 8. 24. 21:16

    경주임란의사추모탑(慶州壬亂義士追慕塔)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 산 1-1 황성공원내 임란창의공원에 있는 경주임란의사추모탑












    문천회맹기념비(蚊川會盟記念碑)



    경주임란의사창의비(慶州壬亂義士倡義碑)



    임란순절의사위령비(壬亂殉節義士慰靈碑)



    임란창의공원 표석(壬亂倡義公園 標石)



    동도객관벽상기(東都客館壁上記)


    ! 무릇 환란(患難)을 벗어나고자 함은 사람의 정()이다.

    그롷지만 환란을 당하여 의()로서 감당해야 한다면 환란에도 의를 지켜야 하는데,

    어찌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에 이끌려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잇겠는가.

    이로서 성인(聖人)은 사람을 가르쳤고 이를 군자가 몸소 실행함으로써 예의(禮儀)가 생겨나고 기강(紀綱)도 밝혀진다.

    살아서 수모를 겪는 것은 죽어서 영광이 있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나라를 위해 인()을 이룬다 하였고, 맹자(孟子)는 의()를 사람의 도리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반드시 삶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연후에 인()을 이룰 수있고, ()를 취할 수 있다.

    세상에 간혹 충정(忠情)과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들은 모두 그 책임의 중요함과 국가 사명의 엄정함으로 인하여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과 칼날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죽음으로서 공을 이뤄

    금석(金石)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함이 있으니, 참으로 위대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이 나라의 군사적 책무를 맡은 바 없으면서도 미리 대비책을 세우고,

    전란이 일어나기 전에 무기를 만들며 곡식을 쌓아두고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를 맹세하였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백성을 구제하여 도적을 토벌하는 것보다는 못하였다.

    여기 여러 의사(義士)들은 한 직급의 품계도 받지 못한 병사를 거느리고 병화(兵火)가 함몰하는 그 날

    선인들의 장렬한 충절을 되새게며 임금님이 선비를 아껴주던 은혜만을 생각하였다.

    따라서 분연히 나라를 걱정하는 성의(誠意)에서 오직 국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의 목숨은 잊었다.

    죽음을 무릅쓴 군사 수 천 명을 모아서 산천에 출몰하였으니, 그 충성은 천심(天心)을 꿰뚫었다.

    여러번 목숨으로서 큰 전공을 세우고, 수공(水攻)과 화전(火戰)을 통해서 왜구 수 천 급(數千級)을 베었다.

    그리고 천시(天時)와 지형을 이용하여 왜선을 쳐부수자, 이때 물에 빠져 죽은 왜구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또한 봉서산(鳳棲山)에서의 획금, 학성(鶴城)에서의 참수, 계림(鷄林)의 대첩(大捷) 등은

    옛 명장(名將)과 지사(智士)라도 이에 겨룰 수 없다.

    동도 수 백리는 여러 의병장이 신기한 계책을 세우고 힘서 싸웠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다.

    한 가정 내의 부자(父子) 형제(兄弟) 숙질(叔姪)이 모두 간성(干城)의 재목이었다.

    이른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었고, 그 아재에 그 조카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라 전체를 통틀어 이 같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부터 오늘날까지 경주와 울산 두 고을에서 오로지 나라를 위한 적심(赤心)으로서 충

    ()에 뿌리를 두고 인()을 이룬 선비를 비로소 보았다.

    또한 어쩌면 그렇게도 청렴하고 충의가 뛰어날 수 있는가. 공을 세우고 벼슬에 나아가고자 함은 사람마다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자신들이 세운 전공을 한 번도 나라에 알리지 않고, 그 공을 여러 군사들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저자거리로 가는 사람들처럼 많았다.

    세상에 공훈(功勳)과 정충(貞忠)을 구한 사람 중에서, 어지 높은 관직과 중한 녹봉을 받은 자만이 홀로 아름다움을 차지할 수 잇단 말인가?

    이로써 객관(客館) 동현 위에 이 글을 써 붙여 온 고을의 사민(士民)들에게 널이 선포하고,

    초야에 묻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충의를 떨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면(勸勉)하려 한다.

    계사년(癸巳年, 1593) 7월에 부윤(府尹) 파평(坡平) 윤인함(尹仁涵)이 짓다.


     


    경주임란의사 추모탑 건립문


    충의(忠義) 의사들의 높은 기개와 구국정신을 귀감으로 삼으리,

    여기 유서 깊은 역사의 자리 황성공원 들머리에 애국을 위한 항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임란의사들의 추모탑이

    드높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오르니 이는 우리 후손돌에게 창의(倡義)의 뜻을 일깨우는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가슴 설레게 하니라,

    선조 25년 서기 1592년 4월 왜적들이 우리 한반도에 물밀 듯이 쳐들어 와 마침내 경주성까지 함락하여

    조국강토가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을 때, 나라를 지키려는 구국의 일념으로 뭉친 6월 9일의 "문천회맹(蚊川會盟)"의 결의는

    조국을 살린 위대한 의거의 횃불로 피어났느리라. 경주를 중심으로 창의(倡義)의 기치를 든 의병들은 그 해 7월 영천성을 탈환하고,

    9월에는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앞세워 유격전으로 경주성을 되찾아 전국 의병봉기의 불길을 치솟게 하였으니,

    이 숭고한 화랑정신은 국난을 극복하는 민족혼의 바탕이 되었느니라.

    이제 "경주임란의사추모사업회"가 의사들의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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