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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8. 31. 04:30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부여 정림사지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


    이 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정림사 절터 한가운데 자리한 오층석탑은 높이가 8.33m의 결코 작지 않는 탑으로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민흘림 기법을 적용해 상승감을 보여주는 등

    장중하면서도 부드럽고 육중하면서도 단아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신라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이란 글씨를 새겨놓아

    한동안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정림사지 출토 초석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표석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


    부여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디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부여 정림사지(사적 제301)는 사비도성 내에 위치하는 백제의 중심사찰이다.
    백제시대의 정림사는 중문(中門), (),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동서회랑과 동편건물지, 서편건물지, 북편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규모는 동서 약 62m, 남북 약 120m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된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정림사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확인되어 정림사지가 창건이전에도 공방시설을 조성한 공간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고려시대에도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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