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Today
Yesterday
Total
  • 절두산 순교기념비(切頭山 殉敎記念碑)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6. 11. 10. 04:02

    절두산 순교기념비(切頭山 殉敎記念碑)


    절두산에서 순교자들은 몇 명이었을까?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까지 합쳐 1만 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수천 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수백 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그 수를 크게 늘려 잡은 데는 병인박해 기간 내내 천주교 신자들을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과,

    국왕의 재가를 기다리지 말고 체포하자마자 해당 지방관이 처형한 다음 보고하라는 선참후계에 따라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재판 없이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알아보았듯이 병인박해 기간 내내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18661023일부터 1867730일까지 한시적으로 처형했을 뿐이다.

    또한 선참후계 조처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에서 마구잡이로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선참후계의 처형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해당하는 조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로 보고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를 단속하는 데 선참후계의 형식을 따르게 했지만,

    도성과 인접해 있는 절두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에 선참후계의 논의가 있었고, 국왕이 이를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조치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군함이 조선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난 1011월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처형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 기간에 양화진, 강화 등 서울 부근에서 최소한 6차례 이상 3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으나,

    이때에도 매번 국왕의 윤허를 받고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근거가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절두산에서 1만 명 또는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또한 1865년 당시 천주교 신자는 모두 23천 명이었고,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 합쳐 약 8천 명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도

    그러한 주장이 크게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몇 명 정도일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29명을 가지고 그 근사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확인한 수치로 기준을 잡으면 전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310명이고,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466명이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9명이다.

    이와 같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들의 비중을 무명 순교자들까지 합친 전국 순교자 수인 8천 명에 대비시켜 계산해 보면,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843명으로 추산되고,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77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까지 합친 절두산 순교자들은

    177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기념비문(切頭山 殉敎記念碑文)


    하느님은 가장 고귀한 존재인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참 믿음은 인간 자신을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로 변화시켜주었고 인류의 역사는 인간존엄성을 드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 믿음을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을 바쳤고 그 희생을 거름삼아 인간에 대한 사랑은 커갔다.

    1784년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믿음을 겨례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이들은 믿음을 증거하려고 자신을 여미며 이웃사랑을 실천했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참 믿음을 터득한 이들은 어떠한 어려움을 무릎쓰더라도 새로운 기쁨을 증언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했다.

    이곳 한강가 양화나루 절두산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이웃사랑의 중요성을 피흘려 증거한 신앙의 현장이 되었다. 

    1866년에서 1867년에 걸쳐 이곳에서는 이의송(李義松)프란치스코와 김예쁜마리아부부를 비롯해서

    적어도 33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려 순교했다.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더 많은 순교자의 피가 여기의 모래톱을 적시었으리라.

    사람들은 이곳의 잠두봉을 절두산이라 고쳐불렀지만 순교자들은 바로 이 터를 거룩한 땅, 성지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순교자로서의 명예까지도 마다하고

    자신의 이름마저 하느님께 봉헌하여 무명순교자로 남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꿈이 배인 이 곳에 그 장한 믿음을 돌에 새겨서 기리고자 한다.
    지금 그들 모두는 자신의 꿈을 나누고자 여기에 우리를 초대한다.

    이에 초대받은 우리도 마음을 비워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그 모범을 따라 우리가 서있는 곳들을 새로운 성지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곳 절두산 성지는 앞서간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모름지기 자신의 믿음을 추스르고

    순교자와 증거자가 꿈꾼 세상을 위해 투신을 다짐하는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순교자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이 돌에 심어 전한다.


    2000년 9월 20일 순교자의 날에


    배갑진 신부가 세우고 조광이 글을 짓고 이춘만이 조각하고 김단희가 글씨를 쓰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