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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 사적 제197호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12. 6. 05:30
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 사적 제197호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 1455~1468 재위.1417~1468년)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윤씨가 묻힌 곳이다.
세조는 1417년 9월29일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과 무예도 뛰어났다.
처음에는 진양대군(晋陽大君)이었으나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世宗)의 명을 받들어 불서(佛書)의 번역을 관장 했으며, 향악(鄕樂)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1452년(문종文宗2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 都提調)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다.
세종(世宗)에 이은 문종(文宗)이 재위 3년만에 승하하고 어린 단종(端宗)이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원년)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조정의 원로인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과 그의 경쟁자였던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전위(傳位)받았다.
만년에는 왕위 찬탈에 대한 고뇌에 싸여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여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佛經)을 간행했다.
1468년 왕세자(예종)에게 왕위를 전위하고 이튼날 수강궁(壽康宮) 정침(正寢)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광릉(光陵)은 같은 능선아래의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를 따로 봉안한 동원이강(同原異岡)능제이면서두 능의 중간 지점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운 최초의 능이다.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고 봉분 곁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고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는 등 조선조 능제의 일대변혁을 가져왔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 윤씨는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의 딸로 태여나,세종10년(1428) 혼인 하였고,1455년 왕비가 되였다.
덕종(德宗:추존). 예종(睿宗). 의숙공주(懿淑公主)를 낳았다.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른후 7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후로 유명하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
광릉 정자각(光陵 丁字閣)
정자각은 능 앞에 정자(丁字) 모양으로 지은 집으로,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세조(世祖)
세조(재세: 1417년 음력 9월 29일~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 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에 진평대군에 책봉되었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이 즉위 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 즉위 후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상왕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1468년(예종 즉위)에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貞熹王后)
정희왕후 윤씨(재세: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에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 대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계유정난 당시에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광릉은 조선 제7대 임금 세조(世祖,1417~1468, 재위:1455~1468)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1418~1483)의 능이다.정희왕후를 왕릉 동쪽 언덕에 안장하고, 그 사이에 정자각을 세웠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인 세조는 왕이 된 후에는 국방력 강화, 직전법(職田法)실시,
이정옥과 이시애의 난 진압,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의 시작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정희왕후는 윤번(尹磻)의 딸로 덕종과 예종 두 아들을 낳았는데, 덕종의 아들이 9대 임금 성종이 되었다.
능침을 검소하게 하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石室) 대신 회격(灰隔)으로 방을 만들고,
능침을 감싸는 병풍석을 없애 이후 왕릉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광릉(光陵)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1417~1468, 재위: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1418~1483)의 능이다.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45년 (세종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
특히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에 계유정난으로 반대 세력을 없애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즉위 초에는 단종복위운동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을 죽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국방력을 강화하여 여진족을 정벌하였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였으며,국가제도의 정비를 위해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시작하여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루었다.
1468년에 세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돌아가셨다.정희황후는 윤번의 딸로1418년(태종 18)에 태어나, 1428년(세종 10)에 수양대군과 혼인하였고 145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세조 사이에서 2남(추존 덕종德宗, 예종睿宗) 1녀(의숙공주,懿淑公主) 를 낳았으며,1469년에 예종이 돌아가시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1476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1483년에 온양행궁에서 돌아가셨다.
광릉(光陵) -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세조(世祖, 1417~1468, 재위:1455~1468)는 제4대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거치며 떨어졌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과 육조(이,호,예,병,형,공조)를 직접 연결하는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호적·호패제를 강화했다.
진관체제를 실시해 전국 방위체제를 수립하고 중앙군을 5위로 개편했다.
1460년,1467년 두 차례에 걸쳐 북방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국방도 튼튼히 했다.
각종법전을 정비하고 조선의 공식 통치규범인『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1468년(세조 14) 9월 8일 수강궁(옛 창경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는 판중추부사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세종 10)세조와 가례를 올리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20세에 요절한 뒤 차남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였으나 예종마저 재위 14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고 13세 성종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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