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릉(思陵) -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12. 8. 05:00

    사릉(思陵) -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실록으로 엿보는 왕 과 비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한 왕후의 뒤안길(정순왕후)

    한나라 왕비였던 여인의 한 서린 통곡이 백성들의 마음까지 울린 것일까.

    정순왕후가 산봉우리에 올라 곡을 하면 민초들도 따라 울었고,

    생계가 어려운 왕후를 위해 아낙들이 앞장서 채소와 과일을 사리문 안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정순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많다.

    그도 그렇 것이 정순왕후는 18세에 궁에서 쫓겨나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민가에서 살았다.

    민가라고 하지만 허물어져가는  초막과 같은 집, 어쩌면 그녀의 생활도 초막처럼 누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뒤안길은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했음으로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는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정순왕후의 한 많은 세월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시작된다.

    영영 이별한 다리,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가 채1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된 다리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될 때 두 사람은 이 다리에서 이별을 했다고 한다.

    이제나 저제나 뵈려나, 단종을 그리는 정순왕후의 애틋한 마음이 영도교라는 이름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홀로 민가로 들어갈 적에 정순왕후는 알았을까. 그것이 단종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는 것을.


    이윽고 조용했던 초막에 쳥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민초들과 섞여 사는 남루한 삶에도 꺾이지 않았던 정순왕후의 꼿꼿함은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 많은 여인은 외롭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또 애도하며 매일 같이 산봉우리 거북바위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똥쪽을 향해 구슬피 통곡했다.

    그녀의 통고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녀가 매일 같이 올라 통고하던 산봉우리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많은 삶이 그녀로 하여금 쉽게 눈조차 감을 수 없도록 한 것일까. 단종이 죽고도 정순왕후는 64년을 더 살았다.

    의지할 자식조차 없는 삶이었지만 마을 아낙들이 그녀를 살붙이처럼 보살폈다.

    때로 음식을 날라주며 왕후를 보필했다고도 하고, 정순왕후를 위해 그녀가 사는 곳 주변에 채소시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순조 때 펴낸(한경자락)을 보면 동대문 밖 동묘 서남쪽에 한양에서 가장 큰 채소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독특한 점은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던 금남구역이었다는 것이다.

    아낙들이 정순왕후를 돕는 것을 조정에서 알까봐 아예 남자들의 출입을 금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세조가 말년에 정순왕후에게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었지만 정순왕후는 그것을 고이 받아줄 여인이 아니었다.

    생활고가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쓸쓸히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 된 자식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

    시녀들이 동냥한 음식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이었지만 정순왕후는 세조의 도움을 뿌리치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가 염색업을 했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다.





    사릉 -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454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457년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도 궁궐에서 쫓겨나 부인으로 강봉되었고  그 후 단종을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단종이 17세 나이로 죽임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지금의 청룡사)뒤 산봉우리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으며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1698(숙종24)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이 복위되자 정순왕후도 부인에서 왕후로 복위되었다.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 - 사적 제209


    사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 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 작은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면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1698(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사릉에는 궁과 능 등 문화재지역에 심을 나무를 기르는 전통수목 양묘장이 있다.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


    사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 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 작은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면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厚賜)없이 승하함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

    해주 정씨가의 묘역에 장례하고 제사도 정씨가에서 지내 왔다.

    1698(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훗날 영조는 정순왕후가 궁궐을 나가 평생을 보낸 정업원(淨業院)(현 종로구 숭인동)에 비각을 세우고

    단종이 있는 영월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진 뒷산 바위에 동망봉(東望峯)이라는 글을 친필로 새겼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