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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릉(洪陵) -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陵)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12. 13. 04:57

    홍릉(洪陵) -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陵)



    홍릉 수라간(洪陵 水剌間)


    수라간은 왕릉에 제향을 지낼 때 제사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의 준비하는 곳이다.






     

    홍살문에서 신도, 어도를 따라 양쪽으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오양의 석상을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홍릉 제향일

    고종 : 매년 1월 21일(양력)

    명성황후 : 매년 10월 8일(양력)







    홍릉 비각(洪陵 碑閣)


    비각은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홍릉 비문(洪陵 碑文)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大韓 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左)





     

    어정(御井) 뒤로 보이는 홍릉(洪陵)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과 석물의 위치와 종류,

    숫자가 다르며 정자각 대신 일자각 침전이 자리하고 있다.





    홍릉에는 원지원도 형식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고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연못이 아닌

    가운데 둥그런 섬을 두고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인 원지원도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 과 비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 (고종)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의 말이.

    또 고종의 황제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 논설은 감격적인 희망으로 장식됐다.


    "광무 원년(1897년)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선이 몇 천 년동안 청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우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샤,

    대황제국 되었으니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이런 기록들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무능한 임금 이라는 이미지는 찾아볼수 없다.

    물론 고종에 대한 평가는 그 빛과 어둠이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적어도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도포자락에서 숨거나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둘리기만한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그리고 같은 날 고종은 온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했으며 왕후가 죽었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고종실록 33년(1896년) 2월 11일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삼은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으니 취소하라는 전교이다.


    아관파천으로 만들어진 좁은 틈새로 고종은 본격적인 홀로 서기를 준비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개혁을 꿈꾼 것이다.

    그가 생각한 근대개혁은 전통을 계승하되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는 것,

    500년간 다져진 틀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서양 도시의 특징을 도입한 서울 근대화 사업은 그의 주요한 치적 중 하나다.
    고종은 당시 미국의 수도로 명성이 높았던 워싱턴 DC를 모델로 대통령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도로를 만들어

    그 중심에 대한제국의 새로운 본궁인 경운궁을 건설하게 했다.

    조선시대 궁 가운데 유일하게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덕수궁이 바로 이때 만들어진것이다.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했던 격동의 조선 말기, 한없이 불안하기만 했던 백성들은

    고종이 이룩한 변화 속에서 잠시나마 희망의 빛을 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야심찬 의지가 있었다 한들 고종 역시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근대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그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1919년1월21일의 일이다.

    이 때 세간에는 그가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하여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3월 1일.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일게 된다.
    이날 온 나라를 울렸던 백성들의 함성은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목소리인 동시에 비명에 떠난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황후" (명성황후)
    왕비는 갓 마흔을 넘긴 듯 했고 아주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흑단 같았으며 피부는 매우 투명해 마치 진주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날카로워 이지적으로 보였다.

    왕비는 아름답고 풍성한 남빛 비단 치마와 진홍색과 푸른색이 조화로운 비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목 부분은 산호 장식이 되어 있었다. (중략) 대화가 시작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그녀의 얼굴 빛은 지성미가 넘쳐 흘렀다."


    언뜻 보면 영국 왕비 묘사라 해도 손색없을 이 서술은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한국 견문록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밝인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이다.

    비숍은 1894년부터 4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총 11개월에 걸친 현지답사를 했다.

    명성황후와의 만남은 4번에 걸쳐 이뤄졌는데, 그 중 한번은 전적으로 사적인 자리였다고 한다.

    한시간 남짓한 사적인 대화를 나눈 후 그녀는 명성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

    그리고 통역관이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탁월한 말솜씨에 감명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 대화 내용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없지만, 만남이 끝난 후 그녀는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

     


     

    "명성황후의 삶은 하나의 투쟁이었다."
    비숍과 명성황후가 만난 자리에는 또 한명의 여인이 동석하고 있었다.

    선교사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미국인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저서 상투의 나라 한국에서의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Life in Korea)」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황후는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그의 반대자라도 그분의 기지를 당해내지 못했다."

    또한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까지 우정을 나눈 이야기를 하면서 "따뜻한 정을 지닌 분이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주었다." 고 말하고 있다.
    두 외국 여인의 기록은 어쩌면 한낱 사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면적이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야욕 넘치는여인,

    혹은 일본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된 비운의 국모,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의 시각은 명성황후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더욱이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들 시각은 객관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비숍과 언더우드 외에도 당시 한국에 거처했던 많은 외국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황후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명성황후는 강한 의지와 총명함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었던 소녀가 한 나라의 국모가 되어 국운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명성황후의 삶 곳곳에는 그녀만의 뛰어난 기지와 노력,

    그리고 영욕이 서린 세월을 살다간 한 여인의 노고가 숨어 있다.





    조선왕릉 주요 상설, 명칭


     1) 곡장(曲墻) 봉분을 보호하기위하여 삼면에 둘러 놓은 담장
     2) 능침(능침) 왕이나 왕비의 봉분, 능상이라고도 하며 병풍석, 난간석 등으로 구성.
     3) 석양(石羊) 4)석호(石虎)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

    온순함을 상징하는 양과 사나움을 나타내는 호랑이를 무덤 양쪽에 두 기씩 번갈아 설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룸과 동시에 악귀들의 접근을 막는 수호신

     5)혼유석(魂遊石) 상석에 해당하며, 영혼이 나와 놀다가는 곳

     6)망주석(望柱石) 혼이 봉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표지석.
     7)장명등(長明燈)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

     8)문인석(文人石)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두 손으로 홀(笏)을 쥐고있다

     9)석마(石馬)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뒤나 옆에는 말이 서 있다. 중국 왕릉에는 없는 조선 왕릉 고유의 형식.
    10)무인석(武人石)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있으며, 두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있다
     11)산신석(山神石) 시신을 모신 후에 3년 동안 토지를 관장하는 신인 후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

    주로 정자각의 오른쪽 위, 예감과 마주 보는 곳에 설치.

     12)예감(瘞坎) 제사를 지낸 후에 축문을 태우는 돌함으로 ‘망료위’라고도 함. 정자각 뒤 왼쪽에 있다
     13)비각(碑閣) 왕의 생전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한곳
     14)정자각(丁字閣)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丁(정)’ 자 모양의 집이어서 정자각이라 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이곳에 오르내릴 때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즉, 동쪽 계단으로 오르고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야 한다. 황제는 일(日)자, 왕은 정(丁)자 모양이라한다.
     15)참도(參道)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로 왼쪽은 높게, 오른쪽은 낮게 만들어져 있다.

    높은 쪽은 혼이 다니는 길로 ‘신도(神道)’, 낮은 곳은 임금이 다니는 길로 ‘어도(御道)’라 한다.
     16)수복방(守僕房) 능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
     17)수라간(水刺間)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기에 나누어 담는 주방.
     18)배위(拜位) 왕이나 제관이 무덤을 참배하러 오면 이곳에서 먼저

    무덤을 향해 절을 올리면서 ‘참배하러 왔음’을 무덤의 주인공에게 알림.

    홍살문 옆에 3.3㎡ 정도로 돌을 깔아 놓고, 이곳에서 4배를 하며 제향을 올리러 온 것을 알림.
     19)홍살문(紅箭門) 신성 구역을 표시하는 문으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 살을 박아 놓음.

    홍문, 홍전문으로도 불림

     20)금천교(禁川橋)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21)재실(齋室) 능 제사 준비를 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

     22)병풍석(屛風石) 능의 주위를 병풍처럼 빙 둘러서 무덤을 보호하고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이 해당 방위에 맞게 새겨져 있어 잡귀들이 무덤 안에 들어올 수 없게 함.

    ‘둘레돌’, ‘호석’이라고도 한다.





    홍릉(洪陵) -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陵)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 능이다.
    고종(高宗, 재세1852~1919, 재위1863~1907)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익종(추존 문조)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나이에 즉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1873(고종 10)친정을 선포하고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76),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는 등 대외개방 정책을 펼쳤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혁명(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을 겪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고종 친정 이후 조선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에 의해1895년 시해되었다.





    홍릉(洪陵)


    홍릉(洪陵)은 대한제국(大韓帝國) 1대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 재위 1863~1907)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의 합장릉이다.
    고종황제는 홍선대원군의 아들로 서양각국과 수교하며 개화정책을 펼쳤고,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헤이그 밀사 파견사건(1907년)으로 퇴위되어

    덕수궁(경운궁)에 태왕(太王)으로 있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종황제의 장례일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1866년에 왕비가 되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외교정책을 펴다가 1895년에 을미사변으로 참변을 당했다.
    1897년에 청량리(현 홍릉수목원 자리)에 모셨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천장(遷葬)하여 합장(合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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