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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7. 1. 27. 19:52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2000년 8월 16일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와 통영시에서 공동으로 건립한 해병대표지석

    (경남 통영시 용남면 신거제대교입구)





    전사 약기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괴군 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층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 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7척의 해군함정의 지원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만에 전술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통영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망일봉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영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해,

    여러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대대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의 서측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 잡는 해병"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해병대 통영상륙작전(1950.8.17~9.22)


    개요
    북한군의 공격이 8월에 접어 들면서 약간 저하되고 대략 낙동강을 중심으로 적군과 아군이 대치하는 상태에서

    동부전선은 포항을 중심으로 하여 중부에서는 왜관 등지에 혈전이 여전히 반복되었고,

    서부지구에서는 마산과 진해‚ 부산을 위협하게 되었다.


    전투상황
    진동리 지구의 적은 매일 증강되는 유엔군의 철통같은 방어작전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대로  마산‚ 진해‚ 부산 등을 손아귀에 넣을수 없음을 알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통영으로 돌려

    견내량 해협을 건너 거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마산과 진해는 해상으로부터 봉쇄되며 양지역은 적의 사정거리에있게 되는 것이었다.
    8월 15일 미명을 기하여 북한군 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 대대 약 650명이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하였고

    이날 17:00시 경에는 그 선두가 통영읍 북방 3km 지점인 통영반도로 통하는 가장 좁은 지대인 원문고개에 침투하였다.
    이때 경찰관 약 100명이 원문고개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적의 공격을 감당치 못하고 야음을 이용, 통영을 포기하고 한산도로 철수하여 버렸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1950년 8월 16일 해군참모총장은 김성은 부대로 하여금

    즉시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침투하려는 적을 격멸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2척의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밤 10시경 군항을 출항했던 김부대장은

    이튿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지도 동쪽 기슭에 이르러 자신이 세워놓은 복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즉 먼저 2개 조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통영시가지 쪽과 거제도 서해안 쪽의 적정을 살펴본 그는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다.

    기백 명의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다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함을 비롯한 수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長坪里)에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그 이튿날 새벽 통영시가지를 살필 수 있는 망일봉(望日峰, 해발 148m)을 먼저 점령하고‚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통영의 적을 독안에 든 쥐를 때려잡듯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결과 작전명령의 변경을 승인 받게된 김성은 부대장은 703함 함장과의 협의를 거쳐

    PC–703함과 소해정 504‚ 512‚ 302‚ 307, FS 평택함, AKL 901함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고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 계획대로 그 이튿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점령하여 한 발 뒤늦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 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되었다.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응원병력을 지원받은 다음 그 다음 날(8.19) 새벽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통영 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게 되었다.


    전과
    적사살: 469명, 포로: 83명
    노획무기(야포 3문, 소중화기 296점, 차량 12대, 전화기 5대)


    피해
    전사: 19명, 부상: 47명


    작전의의
    통영지구 작전은 해병대가 단독으로 해군 함정과 공군의 T -6기, F-51D기 3대의 지원하에 수행한 작전으로서

    유엔군이 방어에 급급할 때 국군의 유일한 공격전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전의 성공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이 작전은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잔전이었으며, 한국해병대의 처음 상륙작전이었다.

    당시 원문고개를 찾아온 외신 종군기자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이란 명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이 시작된 이후 적의 수중에 들어간 국토를 처음으로 되찾았음)




    해병대 통영상륙작전 지휘관 "김성은 장군(金聖恩 將軍)"


    대한민국 해병대를 지칭할 때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하는데

    이 수식어는 6·25당시 한국군 최초의 단독작전이고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일 뿐 아니라,

    이 승리로 인해 6·25 전쟁을 역전시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통영 한산대첩과 더불어 한국 전쟁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김성은 장군은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해군병학교 졸업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만 28세에 장군(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제15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고,

    그는 통영상륙작전은 물론 영덕·안동지구작전, 홍천·가리천·화천지구 전투 등에서도 전공을 세웠고

    1951년 태극무공훈장, 美 은성무공훈장과 美 공로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전주, 함양, 진주 등에서 저지시켰고,

    부산 공격을 위해 진동지구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적 200여 명을 사살했다.


    이후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완고하게 저항하자

    북한군은 마산, 진해, 부산을 우회해 공격하고자 북한군 7사단이 통영을 점령하였다.

    이에 김성은 장군은 거제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하다 통영을 직접 상륙하여 소탕작전을 펼칠 것을 상부에 다시 건의하여

    당년 8월 17일 원문고개와 망일봉으로 나누어 상륙작전을 통한 기습공격을 감행해 통영을 탈환 하는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남측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해, 마산과 부산 공격을 위한 북한군의 거제도 포병의 진지 구축을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역으로 한국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한국 전쟁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만약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6.25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고 있다.

    해병대가 통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인민군 7사단은 진해와 부산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포병부대를 거제도에 주둔시켰을 것이고,

    거제에서 완전한 포(砲) 사정거리가 되는 부산은 물론 당시 임시정부와

    진해, 마산, 부산의 수천만 피난민들의 피해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반전시킨 한산대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이 견내량(장평리)에서 시작되었듯이 통영상륙작전도 견내량(장평리)에서 시작되었다.

    적을 속인 작전 또한 유사하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곳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작전을 펼쳤고

    김성은 장군은 해군함정의 유도포 공격으로 적들을 통영시내로 유인시켜 견내량을 통해

    망일봉과 원문고개를 장악하고 적을 가두는 전술을 구사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는 맥아더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의 자신감이 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해병들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9.28 서울수복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장군은 ‘이순신장군을 떠올리며 전쟁에 임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충렬사와 세병관 그리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폭발하지 않는 무쇠탄을 사용해

    적을 교란만 시키고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병대의 실제 투입으로 적을 장악했다.

    그가 이순신의 후예였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통영을 탈환하고

    부하들과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 장군께 승리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산대첩의 전사자가 19명인데 통영상륙작전의 전사자도 19명이다.

    통영상륙작전에서 전사한 해병들은 현재 용남면 두타사 ‘해병의 집’에 모셔져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월 8월 한산대첩축제와 더불어 전국 해병과 유족 현역들이

    통영지구전투전적비 아래 모여 통영상륙작전 전승행사 및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성은 장군은 2007년 5월 15일 영면하시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유래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여기자


    1950년 "뉴욕 헤럴드 트리분(The New York Herald Tribune)지" 의 도쿄 특파원이었던 여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 소식을 접하자 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

    한국전선에 뛰어들어 열정적 취재로 독자들에게 한국전쟁을 생생하게 전하였으며,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수개 국어로 출판되어 대단한 인기도 끌었다.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보다 진흙과 먼지를 바른 여자”,

    “남자보다 더 용감한 아름다운 여자”라고 미 언론들은 그녀를 묘사하였으며, 또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부산, 거제 사수를 위해 한국해병 단독(불과 500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해군 함정의 지원 엄호를 받으며 북한군 7사단을 기습하여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어내자

    당시 외신 여종군기자인 마거릿 히긴스는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한국 해병은 귀신이라도 잡겠다" 라고(UPI통신)

    기사를 써서 그때 이후로 한국해병에 "귀신 잡는 해병대" 라는 별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국전 휴전 후에는 새로운 분쟁지역인 베트남을 비롯, 동남아에서 취재활동을 하던 중

    불행하게 풍토병에 걸려 1966년 1월 3일 라오스에서 46세의 젊은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마거릿 히긴스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통영타워


    통영타워는 타원형 스카이라운지로 거제와 통영을 가로지르는 견내량 해협에 위치하고 있다.

    전망대는 38m로 1시간 마다 회전하기 때문에 거제대교와  통영, 거제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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