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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3. 20. 05:30

    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

     

    현재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에 큰 건물인 중희당(重熙堂)이 있었고,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동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육각누각인 삼삼와(三三窩), 그 옆 칠분서(七分序)

    그리고 승화루(承華樓)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內醫院)으로 쓰였으며,

    단층의 몸체에 중층의 날개체가 직각으로 붙은 독특한 모습이다.

     

     

     

    성정각 출입문인 영현문(迎賢門)

     

    동궁은 궁궐 건물 형식을 하지 않고 일반 사대부 저택의 솟을대문을 하고 있다.

    이는 권좌에 오르지 않은 세자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춘정(報春亭)

     

    보춘정(報春亭)보춘(報春)’이란 봄을 알린다는 뜻으로 세자의 공부방을 뜻하는 것이다.

    왕세자를 다른 말로 춘궁(春宮)이라 부르듯이 춘()은 동쪽의 상징이자 왕세자를 의미한다.

    매화(梅花)나 춘란(春蘭)보춘화(報春花)’라고도 하였다.

     

     

     

     

     

    희우루(喜雨樓)

     

    희우(喜雨)라는 뜻은 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의미로 1777(정조 1) 가뭄이 무척 심하였는데,

    이 누각을 짓기 시작했을 때 비가 내렸고, 이후 계속 가물다가 이 건물이 완공되어

    임금님이 행차할 때 다시 한번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내의원(內醫院)


    정면 8, 측면 5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액호는 약방이지만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내의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궁중의 진료를 담당했다.

    그러나 1920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궁궐 내의 전각들이 불에 타 일제에 의해 변형되면서

    동궁이였던 성정각에 내의원이 기능을 빼기고 헐렸으나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調和御藥(조화어약) - 임금의 약을 조절함

     

     

    保護聖躬(보호성궁) - 임금의 옥체를 보호함

     

     

     

    관물헌(觀物軒)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여기에 걸린 '집희(絹熙)'라는 편액은 세자 시절의 순종이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덕혜옹주(德惠翁主)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 집희(緝熙) - 관물헌(觀物軒)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동궐도(東闕圖)에서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집희(緝熙)”라고 두 글자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집희라는 현판에 갑자년(甲子年)’, ‘어필(御筆)’이라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즉위 원년에 15세의 나이로 글씨를 썼으므로 다소 서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집희""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殿), (), (), (), (), (), (), ()”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건물의 본래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 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자시문(資始門)

     

    자시문(資始門)1782(정조6) 지어진 중희당(重熙堂)의 서문이었다.

    훗날 일제가 중희당을 없애고 그 자리에 후원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본디 중희당의 서문이었던 자시문(資始門)도 지금은 마치 내의원(성정각)

    동문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근왕파를 앞세워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명성황후(明成皇后)

    구식 군대의 반란(임오군란)으로 상궁(尙宮)으로 변장하여 이 문을 지나 피신했다.

     

     

     

     

     

     

     

    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

     

    성정(誠正)이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 글자를 따온 것이다.

    "대학(大學)"이라는 유교 경전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단계)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명명덕어천하(明明德於天下)로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성의(誠意)란 뜻을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요정심(正心)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창덕궁의 성정각(誠正閣)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을 토론하는 것곧 서연(書筵)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迎賢門: 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내의원(內醫院)이라 쓰여 있다.

    이곳을 이렇게 소개 하는 것은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內醫院)으로 쓰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해본다.

     '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에 그려진 성정각의 그림과 현존하는  건물과는 모습이 부합된다.

    그런데 정조 이후의 중수 기록이 없으며성정각 현판이 정조 어필이라는 기록과

    성정각 동쪽의 중희당을  정조 6년에 세우는 등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건물은 정조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조 임금은 재위 5(1781)에 일찍이 숙종께서 지은 <성정각 경계십잠(誠正閣 警戒十箴)>이라는 기문을

    조윤형에게 정서하게 하여, 친필로 된 '성정각(誠正閣)'이라는 현판과 함께

    성정각에 걸어 놓고 몸소 참찬관(參贊官)을 불러 글을 강론할 때면 이곳에서  강론하곤 하였다 한다.

    건물의 편액 가운데는 "조화어약(調和御藥)""보호성궁(保護聖躬)"이 있으며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곳으로 인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궐도'에서는 "약방(藥房)"으로 기록하고 있고 "내국(內局)"이라고도 하였다.

    내의원은 고종 32(1895)에 폐지되고 전의사(典醫司)로 개칭되었으므로

    그 뒤에 성정각을 내의원 용도로 사용한 것 같다.

    1917년의 화재로 임시 침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 1920년대의 중건 때에 내의원으로 바뀐 것 같다.

    성정각은 순조 임금이 왕세자였을 때 글공부를 독려 받던 전각이었다.

    성정각은 정면 6 칸에 측면이 2 칸으로 동쪽칸에는 빈칸이 돌출되어

    그 위의 두 칸과 함께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누마루의 아랫부분은 개방되어 있다.

    그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누마루의 아랫부분은 개방되어 있다.

    그 누마루 서쪽으로 반 칸짜리 마루방이 있고그 옆으로  두 칸방이고

    다음이 대청이며 이어서 앞뒤로 방 두 칸씩이 있다.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반 칸짜리 마루방의 앞퇴에 설치되어 있다.

    앞쪽으로 어간과 협간의 앞퇴 3간이 개방되어 있고,

    기역()자형 마루의 삼면에는 툇마루와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세 살 분합문으로 벽을 구성하였다.

    누마루 정면에 '보춘정(報春亭)' 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라고 쓴 현판을 걸었는데,

    지금은남쪽 정면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현판이 옮겨져 있다.

    동궐도를 보면 예전에는 성정각 앞쪽으로 널찌간 월대가 있었고 누마루 밑에 벽과 창문이 설치되었으며,

    누마루의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담장이 세워지고 그 중앙부에 일각대문인 보춘문이 나 있었다.

    또한 북으로는 누마루의 한 칸 옆에서 북쪽으로 판장이 설치되어 마당을 셋으로 구분지었다.

    그리하여 일각문인 보춘문(報春門) 외에도 존현문(尊賢門), 금서문(琴書門)이 따로 나 있었다.

    지금은 성정각 문간채 5칸이 남아 있어서 서쪽에서 두 번째 칸에 존현문(尊賢門)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이문간채 동쪽에 담장과 연결되어 있는 행각이 있으나, 동궐도에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마당이 세분되는 상태로 보아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의 신분과 직책에 따라 통로를 구분하여

    동궁(東宮)이 한적하게 면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의 판장들은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조립식 판장으로 그려진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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