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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 - 사적 제302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4. 7. 04:34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 - 사적 제302호

     

    낙안읍성(樂安邑城)의 유래(由來)

     

    순천(예전 승주) 낙안읍성의 유래는 조선 태조 6(139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은 것이 그 시초이다.

    인조 4(1626)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 현재의 석성(石城)으로 중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문으로 들어가면 선정을 베풀었던 임경업 군수의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다른 지역 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 길이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1천 평에 달하는

    3개 마을의 생활 근거지를 감싸 안은듯 네모 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지난 지금도 끊긴 데가 전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성안에 100여 세대가 실제 생활하고 있는 살아 숨쉬는 고유의 전통마을로

    민속적인 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문과 서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며,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의 동문, 낙풍루(樂豊樓)

     

     

    낙안읍성의 동문인 낙풍루(樂豊樓)1834(순조4) 성균관 진사 김호언이

    사비 1,400량을 들여 중건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 식민 통치하에 관리 소홀하여 퇴락하여 없어졌으나,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1987년에 복원하였다.

    낙안(樂安)은 농사 고장으로서 문루마다 일년의 사계절과 농사와 관련된 의미를 뜻하고 있어

    동문인 낙풍루는 사계절 중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봄에 씨앗을 뿌리고 풍년을 염원함)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건물의 규모는 2층 누각식 2익공 5량 가구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2층 외곽에 난간을 설치하였고 모로 단청하였으며 삼문이다.

    현판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縣)의 글이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의 낙민루(樂民樓)

     

    낙안 낙민루는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閔重憲 18451846)이 중건하였으며 (또는 조용현(趙溶鉉)이 중수하였다고 함)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3명루로서 1924년 일부분을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낙안 군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눈 루각 이었으나 여순 병란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어

    낙민루 에서 임시 경찰 업무를 수행하던 중 6. 25가 나자 공산군들이 낙민루를 불태우고 말았다.

    공산군들이 낙민루를 불태우는 것을 보면서 당시엔 그 누구라도 이를 말릴 수는 없는 일로서

    그 애석함을 남내리 거주 한신 신천우(申天雨)씨는 이렇게 그 순간을 글로 써 두었다.

     

    "경인(庚寅)년 음력 823일 이른 아침 불길에 쌓인 낙민루 이제는 영원히 보지 못할 낙민루야

    모든 면민이 슬퍼 탄식하고 애석함을 금치 못하나 이를 어찌 말릴수 있으랴.!!"

     

    이렇게 해서 낙안의 보물 하나를 잃어 버렸으나 1986년 낙안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존 초석 위에 3, 측면 2, 17평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의 누각형으로 내부 본부에는 모로 단청하였고

    현판은 전() 승주군수 남송(南松) 신계우(申季雨)씨가 썼으며 옛 자리에 다시 복원하였으나

    옛 것만 같지 못하다고 그때를 아는 분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낙민루 앞뜰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을 사람들이 구정(九停)뜰 이라고 한다.

    조선조 때 낙안이 나주부에 속한 군으로서 나주 부사가 각 군을 순회하시는데

    아홉번째 들려 쉬며 머물렀다 하여 구정(九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낙민루운(樂民樓韻)

     

    드높은 비각(碑閣)에 머루가 아름답고 붉은빛 푸른색이 번쩍 번쩍 새롭구나.

    백오절(百五節)이 오니 버들잎을 피우고 천리밖에 노니는 사람을 게을러지게 하네.

    한밤에 피리 북소리 봄을 알리고 땅에 두른 안개와 꽃은 모든 집이 봄이라네.

    드넓은 난간 머리에 예나 이제나 뜬 달은 의연한 충민공(忠愍公)의 옛 정신이어라.

    - 임자(壬子), 중춘(仲春), 김순철(金淳鐵) -

    위의 시는 낙민루를 노래한 것이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의 남문, 쌍청루(雙淸樓)

     

     

    낙안읍성 성곽의 남문으로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도 하며,

    낙안읍성에 건립된 성문 중 가장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문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쌍청루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1920년대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쌍청루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1899년 낙안군읍지에는 쌍청루의 이름이 진남루라고 변경되어 있다.

    1987년에 복원된 모습은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로

    1층은 10개의 사각 돌기둥을 이용하여 출입문을 만들었다.

    출입문은 2곳 중 1곳은 성벽을 쌓아 막혀있는 상태로서 다른 성문과는 틀린 모습이다.

    2층은 원형 나무기둥 위에 팔작지붕을 올려 놓았다.

    쌍청루는 여름을 의미하며 서쪽 백이산(伯夷山)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름을 건강하고 시원스레 보낸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한편으로는 남쪽의 왜구를 다스린다는 의미(진남, 鎭南)도 있다.

    또한 성안(城內) 사람이 사망하여 상여가 문밖으로 나갈 때에는 이 남문을 통해 나갔다고 전한다.

     

     

     

     

     

     

     

     

     

     

     

     

     

     

     

     

     

     

     

     

     

     

     

     

     

     

     

    낙안팔경(樂安八景)

     

    금강모종(金剛暮鍾) 금전산 금강암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백이청풍(伯夷淸風)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오봉명월(五峯明月) 오봉산 위에 떠오르는 밝고 둥근 달
    보람조하(寶嵐朝霞) 제석산 허리에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옥산총죽(玉山叢竹) 옥산에서 나는 곧은 신우대(화살대로 사용하였으며 왕께 진상하였다)
    원포귀법(遠逋歸法) 멀리 선수 앞바다에 만선의 깃발을 날리며 돌아오는 돛단배.
    용추수석(龍湫水石) 용소의 맑은 물과 깨끗한 돌맹이
    안동화류(雁洞花柳) 안동(내동)의 꽃과 버들(청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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