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산 윤선도의 후손(윤두서,윤덕희,윤용) 작품 -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
    국내 나들이/전시관(展示館) 2017. 4. 20. 19:13

    고산 윤선도의 후손(윤두서,윤덕희,윤용) 작품 -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

     

     

     

    채애도(採艾圖) - 나물 캐는 여인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모시에 먹(苧本水墨, 저본수묵)

    30.4 x 25cm (尹氏家寶, 윤씨가보)


    채애도는 조선회화사상 시골 아낙네들의 노동하는 삶을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예로

    고개를 돌린 여인의 뒷모습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자세로 매우 독창적이다.

    뾰족한 점으로 표현된 풀들 사이로는 이파리가 땅에 바짝 붙어 있는 나물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한 손에 망태기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허리를 구부린 여인과 고개를 돌린 여인의 시선이 캐고자 하는 나물에 꽂혀 있어

    사실성을 추구하는 공재의 예술정신이 돋보이는 그림으로 그의 풍속화 중 대표작이다.

     

     

     

    선차도(旋車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모시에 먹(苧本水墨, 저본수묵)

    32.4 x 20.2cm (尹氏家寶, 윤씨가보)

     

    선차도는 두 장인이 갈이틀(회전차)로 회전시켜가며 칼로 목기를 깎아내는 갈이질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배경을 생략하고 기계의 재현과 작동법에 관심을 집중시킨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 등을 보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피대를 발로 돌리고 있으며,

    마주 앉은 사람은 긴 칼을 양손으로 잡고 큼지막한 함지박을 깎고 있다.

    서민들이 일상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공재언희작선거도(恭齋彦戱作旋車圖, 공재가 장난삼아 선차도를 그리다)”라는 글이 보인다.

     

     

     

    석공공석도(石工攻石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모시에 먹(苧本水墨, 저본수묵)

    22.9 x 17.7cm (개인소장)

     

    큰 바위에 망치로 구멍을 내어 돌을 떼어내는 장면의 풍속도이다.

    윤두서는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구를 이루는 작품을 여러 점 남겼는데

    이 그림도 그중에 하나로 회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왼쪽의 노인은 바위에 뚫린 작은 구멍에 정을 대고 행여나 망치가 잘못 내려치거나

    파편이 튈까 몸을 뒤로 젖히고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고,

    망치를 든 젊은이는 이를 악물고 양손에 힘을 다해 망치를 내려치는 모습이다.

    대조적인 인물의 동작과 표정이 매우 생생하여 두 사람의 심리상태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

     

     

     

    수탐포어도(手探捕漁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絹本淡彩, 견본염채)

    27.0 x 25.5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고기를 잡는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풍속화의 성격을 띠고 있는 그림이다.

    바위와 수초가 드문드문 널려진 물가에서 부자(父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바닥을 훑어서 고기를 잡고 있지만

    이미 한 마리 잡은 물고기는 갈대에 끼워 입에 물고 있고 벗은 옷은 물가 밖 나무 아래에 놓여있다.

    묘사된 모습이 매우 구체적이고 일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로 거론되는 공재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산옹농수도(山翁弄水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직경 21.4cm (尹氏家寶, 윤씨가보)

     

    윤씨가보(尹氏家寶)에 실린 산옹도는 특정한 신선고사를 다루지 않고

    영지바구니가 있어 선옹을 소재로 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선옹은 심산계곡에서 약초를 씻고 있는데, 선옹의 곁에 있는 영지바구니는

     삼재도회(三才圖會)’선불기종(仙佛奇蹤)’에 실려 있는 안기생(安期生)이 들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채약(採藥) 내단(內丹)과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에 공재가 채약을 소재로 택한 것은

    약물과 식물을 섭취하는 양생법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산속에서 냇물에 약초를 씻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경전목우도(耕田牧牛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 ~ 18세기 초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25.0 x 21.0cm (尹氏家寶, 윤씨가보)

     

    이 작품은 산촌의 풍경을 화면에 가득 채우고 비탈진 밭에서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와

    두 마리 소를 풀어둔 채 짚방석을 깔고 낮잠을 자는 목동을 점경인물로 표현한 농촌풍속도이다.

    경전목우도는 농촌의 현장을 눈에 보이는 대로 가감 없이 담고 있어

    민생에 대한 윤두서의 적극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살면서 체험한 전원풍경을 소재로 한점, 낙향 이후 민생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점,

    산수를 구성하는 수지법과 준법의 원숙하고 꼼꼼한 필치, 화면에 찍힌 '효언(孝彦)'등을 감안해 보면

    이 작품은 낙향한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치 고향 해남의 들녘에서 밭갈이하는 풍경을 그린 듯 목가적이다.

     

     

     

    짚신삼기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 ~ 18세기 초

    모시에 먹(苧本水墨, 저본수묵)

    32.4 x 20.2cm (尹氏家寶, 윤씨가보)

     

    짚신삼기는 조선 중기 수하인물도식의 화면 형식을 취하면서 여가시간을 이용해

    짚신을 삼는 현실적인 인물로 주인공만 바뀌어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린 풍속화로 추정된다.

    그러나 짚신을 삼는 장면만큼은 당시 본업에 충실한 촌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주인공은 양쪽 엄지발가락에 새끼를 꼰 4개의 날줄을 걸고 양손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짚신을 삼고 있다.

    오른손바닥 밑으로 절반쯤 완성된 짚신 바닥이 보인다.

    윤두서가 풍속화의 소재로 취한 짚신삼기는 김득신(金得臣, 1754~1822)

    후대 화가들에게 계승되어 이후 풍속화의 중요한 소재로 정착된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 ~ 18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絹本淡彩, 견본염채)

    25.2 x 22.5cm (개인소장)

     

    윤두서의 그림으로는 매우 드물게 채색으로 그려진 산수인물도이다.

    강에는 갈대가 우겨져 있고 배를 탄 어부가 노를 저어 나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강 건너 갈대밭에는 기러기가 날아오르고 있다.

    소재나 표현에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평사낙안(平沙落雁)’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가을의 정취가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전경의 삼각형 모양으로 각이 진 바위 표현에는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화풍의 요소가 남아있다.

    부드러운 필선으로 매우 세밀하게 표현된 인물의 자태는 생동하여 얼굴의 표정까지 느낄 수 있다.

    소품이지만 화면 구성과 묘사가 매우 뛰어나 윤두서는 인물을 잘 그렸으며,

    소품일수록 더욱 뛰어나다는 화평에 부합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조어산수도(釣魚山水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08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26.7 x 15.1cm 家物帖(가물첩)

     

    이 작품은 거룻배 위에서 한가롭게 낚시하는 고사를 소재로 한 가물첩(家物帖)’ 중 한 작품으로

    전경의 언덕에 자라난 나무, 한가롭게 낚시하는 인물, 그리고 화면의 맨 앞에

    몇 개의 돌출된 바위의 표현 등에서 화보를 방작한 흔적이 보인다.

    오른쪽 상단에는 무자맹춘언(戊子孟春彦)’ 이라는 묵서와 함께 효언(孝彦)’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강행도(江行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세기 말 ~ 18세기 초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19.1 x 15.2cm 貫月帖(관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 722~780)강행무제(江行無題)’ 중 제 9수를 쓰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달밤의 강변의 풍경을 그렸는데, 윤두서 특유의 부드럽고 세밀한 필선보다는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어슴푸레한 야경의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하여, 시의 내용에 따라 화법을 달리 했음을 보여준다.

    윤두서는 이 작품처럼 시화일치(詩畫一致)의 경지를 추구하여 조선 후기 시의도의 유행을 선도하였다.

     

     

     

    석양수조도(夕陽垂釣圖)

     

    윤두서(尹斗緖)

    조선 1704

    종이에 먹 (紙絹水墨, 지본수묵)

    23.0 x 55.0cm 家傳寶繪(가전보회)

     

    1704년에 그린 석양수조도는 자신의 일상을 담은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그는 '조선인' 이라는 자각의식이 싹터 이 작품에 '청구자(靑丘子)'라는 별호를 새긴 인장을 사용하였다.

    화면의 왼쪽에 마음이 고요하니 몸 또한 편안하여 낚시줄 거두고 석양에 누웠네 내 낚시 원래 곧지만

    용맹한 장수(강태공)를 꿈꾸진 않네(心靜身還逸 收綸臥夕陽 我釣自直 不是夢鷹揚)”라는 자제시가 있다.

    화면 속의 주인공인 구레나룻과 짙은 눈썹을 가진 이는 공재의 자화상 모습과 유사하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공재는 자신의 일상적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촌부, 시골 아낙네, 석공, 농부의 일상생활 장면을 그린 풍속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였다.

     

     

     

    공기놀이

     

    윤덕희(尹德熙)

    조선 18세기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22.0 x 117.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언덕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두 소년과 바람개비를 든 소년을 묘사하고 있다.

    주위의 바위와 수풀을 깔끔하게 처리하여 단정한 맛과 품격있는 공간을 연출하여

    그 안에 공기돌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들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둥근 돌알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어 공기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어

    공기놀이는 조선시대에도 성행하였던 놀이로 보고 있다.

    버드나무 밑에서 어린이들이 공기돌을 가지고 노는 장면과 이를 부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아이의 모습을 등장시킴으로써 놀이의 재미와 화면에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

     

    윤덕희(尹德熙)

    조선 1763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21.8 x 17.1cm 보장(寶藏) 녹우당 소장

     

    이 작품은 그림에 도담절경(島潭絶境)이라 쓰여 있듯이 충청북도 단양에 있는

    단양팔경 중 하나인 도담삼봉을 실경으로 그린 것으로 윤덕희의 작품 중 진경산수화의 대표로 꼽힌다.

    이 그림은 윤덕희의 글씨와 그림을 모은 서화첩 보장(寶藏)’속에 들어 있으며, 화첩은 그의 그림 4점과 글씨 2점으로 꾸며져 있다.

    화첩의 맨 마지막에 계미년(癸未年, 1763) 7월 낙서 늙은이가 어렵게 만들어 군을 좇아 버금가기를 힘씀으로써

    적막하고 힘든 마음을 위로한다(歲癸未流火月 駱西耋翁艱作 以從軍勉仲 慰寂寞悲鬱之懷)”라고

    적혀 있어서 79세인 1763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노년에 한 쪽 눈이 실명된 상태에서 그린 것으로 만년기까지 진경산수화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산수도(山水圖)

     

    윤덕희(尹德熙)

    조선 18세기

    모시에 먹(苧本水墨, 저본수묵)

    22.1 x 15.3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산수화는 근역화휘(槿域畵彙) 천첩(天帖)에 수록된 윤덕희의 산수화이다.

    윤덕희는 부친 윤두서의 영향으로 전통화풍과 남종화풍을 절충시킨 작품을 주로 남겼지만

    안견파 화풍을 선호한 윤두서와는 달리 조선중기 절파화풍을 더 선호하였다.

    이 작품은 윤덕희가 본격적으로 미법산수 화풍을 구사한 1733년에서 1736년 사이에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운(煙雲)이 짙게 깔린 수촌의 모습을 윤묵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서 그린 개성 있는 작품이다.

    전경의 나무에는 대미점을, 후경의 원산에는 소미점을 적절히 활용하여 미법산수화풍을 구사하였다.

    윤덕희가 남종산수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음을 보여준다.

     

     

     

    산수도(山水圖)

     

    윤덕희(尹德熙)

    조선 18세기

    비단에 먹 (絹本水墨, 견본수묵)

    24.0 x 2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윤두서(尹斗緖)의 우여산수도(雨餘山水圖)를 참고하여 그린 작품으로 보며,

    완만한 산들에 둘러싸인 강가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윤덕희의 산수도에는 대체적으로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화풍(浙派畫風)의 영향에서

    흑백대비가 강한 필묵법으로 전경의 바위와 후경의 높은 원산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담묵(淡墨)의 부드러운 필치로 완만하게 펼쳐진 경관이 묘사되어 화법에 변화가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중국 오파(吳派) 중심으로 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요소가 수용된 것으로도 보며,

    특히 산수도의 전경에 표현된 나무의 특이한 모습은 청대화풍(靑代畫風)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월하고목죽석도(月下古木竹石圖)

     

    윤덕희(尹德熙)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紙絹水墨, 지본수묵)

    28.2 x 22.0cm 駱西拙墨(낙서졸묵)

     

    이 작품은 "낙서졸묵(駱西拙墨)"이라는 표제가 달려 있으며,

    월하고목죽석도, 송석도, 창해범장도, 산수도 2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첩은 선친 윤두서의 그림을 모아 가전보회(家傳寶繪)와 윤씨가보(尹氏家寶)를 꾸몄던

    35(1719) 경에 해남에서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화첩 맨 앞에 서화주(書畫廚)’라는 제명에 부기된 글씨를 잘 써서 호와(왕희지)를 임모하고,

    그림에서는 용면(이공린, 李公麟)을 방한다는 묵서의 기록은 그의 회화 목표와 관련이 있다.

    회화에 입문한 이른 시기부터 전신(傳神)에 능했던 이공린(1054~1105)을 목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월하고목죽석도는 고씨화보(顧氏畵譜)의 곽충서(郭忠恕)의 작품을 토대로

    구름에 반쯤 가린 달을 추가시켜 달밤의 정취를 살린 그림이다.

     

     

     

    협롱채춘도(挾籠埰春圖) -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

     

    윤용(尹愹)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紙絹水墨, 지본수묵)

    표지 27.6 x 21.2cm 간송미술관 소장

     

    공재의 채애도(採艾圖)’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봄기운이 만연한 촌가(村家)

    아낙네들이 나물을 캐기 위해 들녘으로 나선 풍경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물의 묘사는 조부 윤두서(尹斗緖)와 부친 윤덕희(尹德熙)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법을 따랐다.

    사실의 전달에 주력했던 조부나 부친의 풍속화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윤용만의 진전된 회화적 성취가 느껴진다.

    여인은 한손에는 날이 긴 호미를 들고, 그 반대편 옆구리에는 조그만 망태기를 끼고 있다.

    흰 누비 수건을 눌러 쓴 머리, 말아 올린 저고리 소매, 허리춤에 질러 넣은 치맛자락,

    무릎까지 걷어 올린 속바지와 그 아래로 드러난 튼실한 종아리,

    그리고 들메를 한 짚신발 등 전형적인 농촌 아낙네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인은 나물을 캐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으며 일체의 배경은 생략되어 있다.

     

     

     

    행려도(行旅圖)

     

    윤용(尹愹)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紙絹水墨, 지본수묵)

    표지 26.8 x 17.7cm 부국문화재단 소장

     

    이 작품은 당나귀를 타고 산천을 두루 유람한다는 의미에서 야객기려도(夜客騎驢圖)로 분류된다.

    주인을 뒤 따르는 돗자리를 든 시동의 모습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 중국 화보의 반영이다.

    화면 왼쪽 상단의 절벽 위에 보이는 두 채의 암자를 향하여 가고 있는 나귀를 탄 고사와 시동을 그렸다.

    전경의 양편 언덕에서 자라난 수종이 다른 나무들이 고사를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다.

    맑고 경쾌한 붓으로 봄날의 산행 또는 탐승의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화면 오른쪽에 군열작(君悅作)’이라 관서하고 그 밑에 그의 인장을 찍었는데,

    이 두 인장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인장이다.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윤용(尹愹)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紙絹水墨, 지본수묵)

    표지 28.4 x 17.9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편우령환첩(片羽零紈帖) 중 한 장면이다.

    우측 상단에는 늦가을 흰구름이 바다에서 얇게 생기고 밤 깊으니 밝은 달이 산 위에 더디 떠오른다.

    군열(君悅) 그리다라는 제시가 들어있다.

    산과 물이 있는 대자연의 정취를 즐기는 고사를 소재로 한 산수인물도이다.

    그림에서 제화시에 표현된 늦가을 달밤의 정취를 산 너머에 떠오르는 달로 이미지화 하였다.

    고사가 감상하는 자연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물가의 언덕에 걸터앉아

    노를 젖는 뱃사공을 향하여 손짓을 하는 고사는 점경인물로 표현되었다.

     

     

     

     

     

     

     

    윤두서 자화상(恭齋 尹斗緖 自畵像) - 국보 제240

     

    紙本淡彩 (견지염채)

    37.3 X 20.3cm

    고산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

     

    공재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얼굴을 화면전체에 꽉 들어차고도 넘칠듯이 배치하고

    얼굴묘사에는 윤곽이나 어두운 부분에 붓질을 여러번 가하여 짙게 처리, 양감을 부여하였다.

    공재는 사람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다음 그렸기 때문에 매우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윤두서상은 이러한 사실주의적 화풍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공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미인도(美人圖) 117 × 49cm

     

    이 미인도는 고산 윤선도의 14대 종손이 소장 유물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커다란 가체머리를 매만지며 서있는 이 여인은 자주색 선을 대고

    꽃무늬 장식이 있는 노랑삼회장 저고리에 옥색치마를 입고 있다.
    어깨와 팔의 윤곽이 드러나게 달라붙는 저고리는 이 당시의 형식이었고,

    짧은 저고리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속살과 빨간 띠가 눈길을 끈다.
    가체머리가 무거운 듯 무릎을 살짝 구부린 탓으로 치마는 항아리처럼 풍성하다.

    이러한 가체풍속은 조선후기에 사치가 심해져서

    정조 때는 왕명으로 금지시키자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보 제240자화상을 그린 윤두서(1678~1715)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그의 손자 윤용(1708~1740)이 그렸다는 말도 있다.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종애(鐘崖).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愹)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문을 이루었다.

    겸재 정선(鄭歚),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1693(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으며, 새롭게 대두되던 실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산수·인물·영모·초충(草蟲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자화상·노승도 老僧圖를 통해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화풍은 절파계 양식을 수용한 과도기적 작품과 남종화풍으로 그린 작품으로 대별된다.

    그외에 선차도 旋車圖·채애도 採艾圖18세기 후반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해 유행한

    풍속화를 예시해준 것이며 그의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패하백로도 敗荷白鷺圖(간송미술관)는 이색적인 화조화로 풍속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예시해주는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팔준도 八駿圖·백마도 白馬圖등의 말그림은 중국산 말들을 약간 변화시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에 의해 계승되었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에 전하는 유품 가운데 고씨역대명인화보 顧氏歷代名人畵譜는 남종화풍과의 접촉을 알려주며

    동국여지도나 일본지도,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등은 그의 실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채애도·선차도·백마도등은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에 전하고 있으며,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 기졸 記拙·화단 畵斷이 있다.

     

     

     

    윤덕희(尹德熙, 1685~1776)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 연옹(蓮翁), 연포(蓮圃), 현옹(玄翁).

    윤선도(尹善道)의 현손으로, 윤두서(尹斗緖)의 맏아들이며, 윤용(尹愹)의 아버지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초년에 그는 서울 회동(會洞)에 살며 이저(李渚)에게 학문을 배웠다.

    중년기에는 해남의 백련동에 살면서 가전유물을 정리하고 서화를 수련하였다.

    1748년 화명(畵名)으로 삼성진전(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여 정릉현감을 지냈다.

    만년에 해남으로 낙향하였으나 한쪽 눈을 실명하여 작품 활동에는 주력하지 못했고 시를 쓰는 데 몰두하였다.

    아버지 윤두서의 영향으로 화업을 계승하였으며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인물, 말그림을 잘 그렸다.

    그러나 윤두서의 탁월한 필력과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해남의 연동 녹우당(綠雨堂)에 종손이 소장한 윤두서의 작품 해남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

    그가 정리해서 꾸며놓은 것이며, 윤두서의 행장 역시 그가 쓴 것이다.

    최근 윤씨 종가에서 윤덕희의 문집 수발집(淺勤集)이 발견되어 그의 생애에 관해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고

    82세라는 긴 생애 동안 활동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산수화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윤두서의 화풍을 따르면서 동시에 당시

    화단에 만연하였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비교적 깊게 수용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따른 연유로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아울러 도담(島潭)의 실경을 그린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가 남아 있다.

    18세기 전반기 화가 중 가장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다.

    신선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삼재도회(三才圖會), 선불기종(仙佛奇蹤)과 같은

    서적에 수록된 신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선 후기 도석인물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리권도(鐘離權圖)유해섬도(劉海蟾圖)등에서

    삼재도회의 삽화를 수용하였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표작으로는 독서하는 여인, 오누이(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와 같은 풍속화를 비롯하여

    송하고사도(松下高士圖), 마상부인도(馬上婦人圖), 마도(馬圖), 산수도첩(山水圖帖),

    연옹화첩(蓮翁畵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야송하관폭도(月夜松下觀瀑圖)(개인 소장),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윤용(尹愹, 1708~1740)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

    윤선도(尹善道)의 후손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며, 윤덕희(尹德熙)의 차남이다.

    1735(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할아버지 두서와 아버지 덕희로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이어받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33세로 요절하였다.

    술을 좋아하였으며 기품이 있고 맑은 성격에 용모가 수려하였다 한다.

    그림은 집안의 가풍을 계승한 흔적이 역력하며, 또한 화조나 나비·잠자리 등의 초충도(草虫圖)에서도

    대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살핀 다음 꼭 같도록 그렸다는 정약용(丁若鏞)화평이 전한다.

    산수화는 가법(家法)으로 정착된 남종화풍(南宗畫風)을 따랐고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의 회화세계를 연상하게 하는 채애도(採艾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을 남겼다.

    이 밖에 유작으로 수하필서도(樹下筆書圖)(海南宗家 소장홍각춘망도(紅閣春望圖)(간송미술관 소장

    연강우색도(煙江雨色圖)(개인소장) 등이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