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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도(鬱陵島) 독도박물관(獨島博物館)
    국내 나들이/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2017. 5. 1. 05:24

    울릉도(鬱陵島) 독도박물관(獨島博物館)

     

     

     

     

     

     

    독도박물관(獨島博物館)

     

    독도박물관은 독도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내외에 분명히 알리고

    국민들의 영토 및 역사의식을 높이는 산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중앙일보가 창간 30주년과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삼성문화재단과 함께 건립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울릉군은 2천평의 부지를, 서지학자 이종학씨는 자료 555점을 기증하고, 삼성전자는 공사비 80억을 지원하였다.

    지상 2, 지하 1, 연건평 483평의 이 건물은 19956월 착공, 199788일 개관과 함께 울릉군에 기증되었다.

     

     

     

    역사 속의 독도를 보다

     

    한반도의 동쪽 바다를 호령하던 해상왕국 우산국,

    무릉도와 함께 우리의 영토로 기록된 우산도,

    한반도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삼봉도,

    수많은 바다사자들의 서식처였던 가지도,

    강원도의 부속 섬으로 여겨진 울릉도와 울릉도의 부속 섬 석도,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 속에 불렸던 독도의 이름을 보다.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1785년에 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야(林子平)가 그린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이 지도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색갈인 황색으로 칠했고 그 옆에 "조선의 것(朝鮮ノ持二)"이라고
    글자를 써넣어 독도(獨島)와 울릉도(鬱陵島)가 조선 영토임을 더욱 명료하게 표시하고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大韓帝國 勅令 第四十一號)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改稱)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하는 건(件)

    제1조: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야 강원도(江原道)에 부속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야 관제중(官制中)에 편입(編入)하고 군등(郡等)은 오등(五等)으로 할사(事)

    제2조: 군청(郡廳) 위치(位置)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定)하고

    구역(區域)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管轄) 할사(事)

    제3조: 개국오백사년(開國五百四年) 팔월십육일(八月十六日) 관보중(官報中) 관청사항난내(官廳事項欄內)

    울릉도 이하(鬱陵島 以下) 십구자(十九字)를 산거(刪去)하고 개국오백사년(開國五百五年)

    칙령(勅令) 제삼십육호(第三十六號) 제오조(第五條) 강원도이십육군(江原道二十六郡)의 육자(六字)

    칠자(七字)로 개정(改正)하고 안협군하(安峽郡下)에 울도군(鬱島郡) 삼자(三字)를 첨입(添入) 할사(事)

    제4조: 경비는 오등군(五等郡)으로 마련(磨鍊)호되 현금간(現今間)인즉 이액(吏額)이 미비(未備)하고

    서사초창(庶事草創) 하기로 해도수세중(海島收稅中)으로 고선(姑先) 마련(磨鍊) 할사(事)

    제5조: 미비(未備)한 제조(諸條)는 본도개척(本島開拓)을 수(隨)하야 차제(次第) 마련(磨鍊) 할사(事)

     

    부칙(附則)

    제6조: 본령(本令)은 반포일(頒布日)로부터 시행(施行) 할사(事)

     

    칙의정부의정임시서리찬정내부대신(勅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독도(獨島)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독도(獨島라는 이름은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 호의 항해 일지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우리나라 문서 중에서는 1906년 심흥택 울릉군수의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도라는 이름은 울릉도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독섬돌섬의 사투리이다.

    그 이전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독도가 문서와 지도상에 나타나 있다.


    우산도(牛山島)

    울릉도(鬱陵島)에 있었던 고대 우산국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독도의 이름으로 가장 오래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문헌에서 독도를 우산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우()가 천(), (), ()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가지도(可支島)

    가지가 사는 섬, 가지란 바다사자의 일종으로서, ‘강치또는 가제로도 불린다.

    독도에서 가제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종실록>, <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도(石島)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에 등장한 말로

    돌섬을 의미하는 사투리 독섬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삼봉도(三峰島)

    섬이 세 개의 봉우리로 보인다는 뜻으로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마쓰시마(松島, 송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에 독도를 부르던 이름이다

     

    다케시마(竹島, 죽도)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조치에서 처음 등장한 이름이다.

    일본은 독도를 마쓰시마’,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으나

    1905년 이후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있다.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리앙크르호의 선박 이름에서 가져왔다.

    독도가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졌을 때 붙여진 이름으로

    서양인들은 독도를 리앙크르 암으로 불렀다.

     

    호넷 암(Hornet Rocks)

    독도를 발견한 영국함대의 함장 이름을 따서 호넷(Hornet)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영국인들은 독도를 호넷 암으로 불렀다. 

     

    메넬라이-올리부차 (Menelai-Olivutsa)

    러시아 극동함대가 독도를 발견한 후 붙인 이름으로

    서도는 올리부차(Olivutsa)’, 동도는 메넬라이(Menelai)’라고 불렀다.

     

     

     

     

     

    독도에서 살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섬, 독도.

    척박한 환경에서도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한

    우리의 선조가 살아왔던 섬, 독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섬, 독도.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실효적 지배, 즉 독도에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독도에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독도 주민이자 독도리 이장인 김성도씨와 그의 아내인 김신열 씨,

    독도 인근 해역을 감시하며 독도를 지키는 독도경비대원들,

    독도 인근 밤바다를 밝히며 어민의 어로 활동을 디원하는 독도 등대 항로표지관리원,

    그리고 독도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울릉군청 독도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처럼 독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국의 영토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별 생산한 독도소주와 소주잔

     

    1996년과 2013년에 금복주에서 생산한 독도소주와 소주잔으로

    이렇게 만들어 판매하여 남겨진 수익금 중 일부는

    독도 관련사업 후원 및 자선단체 기부에 사용되었다.

     

     

     

    독도(獨島)여 우리들의 혼()이여 (신달자)

    독도의 몸을 만져보아라

    한국의 질박한 황토 살결이 따뜻이 만져지리라

    독도의 입술과 배꼽에

    서둘러 입술을 대어 봐라

    한국의 들끓는 역사의 숨결이 온 몸에 퍼져 오리라

    들어라 독도는 그대 섬나라가 기지개를 켜다

    기우뚱 벗겨나간 신발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견고히 내린 수세기 단단한

    정신의 뿌리이니

    찾지 말아라 독도는 우리의 가슴

    우리의 영혼

    그래 우리 몸 중의 몸이니

    저 독도의 거센 물결들을 봐라

    아득한 수심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저 물결들 겹겹의 메아리를 들어라

    독도는 한국의 또 하나 심장이라고

    흐르며 외치는 저 물결들의 함성을 들어라

    독도는 오늘도 숨차게 독도를 몸 안에 담고

    대한민국의 독도를 낳아 기르며

    대한민국의 섬들을 아우르며 기르며

    한국의 가슴을 늠름히 아우르며 넓히며

    한국의 영혼을 온 몸으로 새기고 있다

    한국의 피를 키우고 있다

    역사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

    들어라

    독도는 다케시마가 아니다

    독도는 다케시마가 아니다

    독도는 또 다른 한국의 영원한 이름이다!

     

     

     

     

     

     

    사운 이종학공 송덕비(史芸 李鍾學公 頌德碑)

     

    한 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

     

    여기 국토의 막내 독도의 영유권 수호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이가 있으니 정녕 겨레의 사표요,

    의인이라 할 것이며 그 숭고한 행적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우국충정 일념으로 독도를 지킨 분이 동래수군 안용복장군과 자랑스런 울릉인 독도의용수비대였다면

    민족정기 지혜로써 독도를 지킨 분은 화성의 의인 사운 이종학 공(史芸 李鍾學 公)이리라.

    세종대왕 친형 양녕대군의 21세손인 공은 1927101(음력 96)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주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선천적으로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서 소년기에는 한학과 덕성을 연마하였으며,

     건국전문대학을 수료한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료 등 역사자료 수집에 몰두해 오셨으며,

    이후 일본의 한국침탈과 독도영유권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해 오셨다.

    공은 198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일본을 50여차례 방문하여 방대한 한일관계사 및 독도관련 자료를 수집,

    이를 집대성하였으며, 평소 조선해는 민족의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해 주는 옥토요,

    독도는 조선해를 지키는 파수꾼이다라고 주장하시면서 독도의 영유권 확립과 동해를 조선해로의 명칭환원운동 등

    우리 영토 수호와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다.

    특히 공이 평생을 통해 모은 독도자료 8301,301점은 독도박물관 건립과 운영의 토대가 되었으며,

    1998년까지 2월부터 20012월까지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역임하셨다.

    20013월에는 평양에서 일제의 조선 강점 비법성에 대한 남북공동 자료전시회를 개최하고

    2,000여점의 자료를 북한사회과학원에 기증하는 등 한일관계사 재정립을 위한 남북한 공동대응방안 모색에도 적극 힘써 오셨으며,

    지역사회를 위하여도 공은 3억여원의 사재를 들여 독도박물관 표석건립과 야외 독도박물원을 조성하여 울릉군에 기증하였으며,

    불우이웃 위문 등 사회복지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쏟음으로써 온 군민의 귀감이 되셨다.

    이렇듯 공이 이땅에서 심어준 거룩한 업적을 영원히 기리고 흠모하기 위하여

    울릉군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 한점 빗돌을 세우니 독도사랑의 시금석이 될 것이요,

    자손만대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이 되리라. “한 줌 재 되어도 독도를 지키겠다

    공의 유지와도 같이 부디 삼봉도(독도) 창해 품에서 영토비벗삼아 영원히 안식하소서...

     

    서기 2003612일 울릉군민 일동

    글씨 한뫼 박경원 謹書

     

     

     

    한 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역임한 사운 이종학 공(史芸 李鍾學 公)은 세종대왕 친형 양녕대군의 21세손으로서

    명문가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버리고 평생을 민족정기 확립과 역사자료 수집. 연구에 헌신해 오셨다.

    198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일본을 방문하여 방대한 한일관계사 및 독도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집대성하는 등

    우리영토 수호와 왜곡된 역사 바로잡는데 일관하였으며 특히 독도박물관 건립의 결정적 토대를 마련하셨다.

    20013월에는 평양에서 일제의 조선강점 비법성에 대한 남북공동자료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3억여원의 사재를 들여 독도박물관 표석 건립과 야외 독도박물원을 조성하고 불우이웃 위문,

    난치병환자 치료비 지원 등 나눔의 사랑 실천에도 소홀함이 없는 의로운 행적을 이어 오셨다.

    이렇듯 공이 이땅에 심어준 거룩한 업적을 영원히 기리고 흠모하기 위하여 울릉군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 한점 빗돌을 세우니 독도 사랑의 시금석이 될 것이요, 자손만대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이 되리라.

     

    서기 2003612일 울릉군민 일동

     

     

     

     

     

    독도(獨島) / 박정진

     

    대륙의 꿈이 돌고 돌아 끝내
    동해에 돌로 박힌 곳
    바라볼 건 일출이요
    들리는 건 파도와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깎아지른 암벽은 하늘을 치솟아 외로움을 내 품는데
    그 틈새로 자주 빛 참나리 향을 품고 있다.
    넌 대륙의 마지막 정절
    일찍이 너같이 홀로 있다고 이름을 붙인
    당돌한 섬은 없었다.
    넌 우리 의지의 결정
    목숨 걸고 절벽에서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친 헌화가(獻花歌)
    옛 신선, 예 살아있구나.
    이런 곳에 홀로 피는 꽃이나
    그 꽃을 꺾어 바치는 마음이나
    이런 곳에 홀로 박힌 몸뚱어리나 
    모두가 꽃이다.


    동해 제일 끝에서 육중한 몸을 흔들어
    맨 먼저 잠을 깨어 달려 나와
    일출을 온 몸으로 받아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암청색 네 몸뚱어리, 넌 우리의 수호신
    나라를 지키고자 산골(散骨)
    문무대왕이 여기 나와 있구나.
    홀로 있지만 그 속에 두 세계 감춘
    동 섬, 서 섬, 암 바위, 수 바위
    그대로 석화산(石花山)이로다.
    육지를 육지로 달려와
    바다와 하늘을 하나로 품는 네 모습 장하다.
    해동성인(海東聖人)이로다.

     

     

     

     

    對馬島本是我國之地(대마도본시아국지지)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땅

     

    (대마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근거가 되는 내용)

    세종원년 717일에 작성된 세종실록 권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속한 본시 우리 땅이니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인으로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모여 소굴을 삼게 되었다.'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347일에 기록한 세종실록 권십일에는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 되었던 것은 옛날 문헌에 분명하며,

    너희 섬 사절 신계도 역시 이 섬은 본시 대국에서 말을 기르던 땅이라 하였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 26430일 기록된 새종실록 권백사에는

    '대내전 관반 노라가로로가 말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말 기르는 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29526일 기록 된 새종실록 권백십육에는

    '대마도도 옛날 문헌에 우리 나라의 말 기르는 땅으로 실려 있고, 왜인도 또 본래 우리 나라의 섬이라고 일러 왔는데

    그러니 그 섬은 결국 도적의 차지가 되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삼 신라본기 삼 실성이사금조에 실린 내용은

    '칠년 봄 이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구도 건 제이십삼층 육판(고산자 김정호)에는

    '대마도는 뱃길로 사백팔십리 동래부의 동남바다 가운데에 있다.

    본시 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실성왕 칠년 왜의 병영 설치로 인하여 왜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도전망대케이블카에서 본 독도박물관주변

     

     

     

     

    망향봉에서 본 독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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