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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와 울릉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안용복 기념관(安龍福 記念館)
    국내 나들이/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2017. 5. 3. 05:30

    독도와 울릉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안용복 기념관(安龍福 記念館)

     

    안용복 기념관은 수천 년간 한국인의 생활 터전이었던 독도를 불법적으로 수탈했던

    일본에 대항해 독도를 지켰던 안용복의 숭고한 애국심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기념관이 들어선 울릉도 천부마을은 조선 고종 때 울릉도 개척 당시 사람들이 드나들던 포구로

    이곳 독도전망대에선 맑은 날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다.
    27천여의 터에 지상 2, 지하 1층 규모로 전시실과 강당, 영상관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하에는 안용복 관련자료를 보관하는 수장고와 자료실이 마련됐다.
    1층은 세미나 및 강연을 위한 강당, 2층 전시실에는 안용복의 활동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2층은 전시실 외에도 4D영상관이 있으며 안용복의 업적과 독도를 특수입체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으며,

    정보검색기, 포토존 등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의 체험공간도 있다.
    옥상에는 독도전망대를 만들어 쾌청한 날 독도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안 선생의 진취적 기상을 표현한 상징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선생의 넋을 기리는 사당도 마련돼 있다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 

     

     

     

     

     

    국토수호 기공불멸(國土守護 其功不滅)

     

    1967년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안용복의 국토수호 즉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토수호 기공불멸"이라 하여 '나라의 땅을 지킨 그의 공적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휘호를 작성하였다.

    이는 전국의 유림들이 독도를 지켜낸 안용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한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휘호는 기념관 중앙 홀 정면 2층 계단 진입 벽면에 전시돼 있다.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에도막부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금지를 결정하였으나 일본 어부가 계속 들어와 어로(漁撈)를 하자

    안용복이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는 깃발을 사용하여 일본에 들어가

    일본 어부의 도항을 금지하기로 한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다.

     

     

     

    안용복(安龍福)이 살았던 시대

     

    안용복이 살았던 숙종조(肅宗朝)를 전후한 17세기는

    소빙기(小氷期: 1450년부터 1890년까지 지속된 상대적으로 추웠던 시기)로 냉해의 피해가 심했다.

    기상이변에 의한 한발, 폐농, 기근 등의 대재난이 엄습했다.

    연속된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조세와 군역 부담을 피해

    북방 청과의 국경지대나 섬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변방의 먼 섬에 도해(渡海)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한 때였으므로

    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동남해연안민들이 울릉도, 독도를 드나들었다.

    1693년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안용복, 박어둔납치사건'을 일으킴으로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조선 사람들과 일본 어부들이 드나들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 에도막부(江戸幕府)와의 외교적 교섭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의 영토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일본에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 땅이라고 알리기 위해 수토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에도막부와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확인하였다.

    그런 까닭에 1900대한제국 칙령 제41를 선포하여

    울릉도에 석도(石島), 즉 독도(獨島)를 관할하였다는 것을 명시할 수 있었다.

     

     

     

    안용복은 누구인가?

     

    안용복의 출생과 사망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호사설(星湖僿說,1761)에는 안용복이 경상 좌수영의

    동래(東萊)의 수군인 능로군(能櫓軍) 출신으로서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익혔다고 기록되었다.

    일본의 죽도고(竹島考, 1828)에는 1693년 안용복이 차고 있는 호패에 서울에 사는

    오충추의 사노(私奴) 용복(用卜)이라고하여 부산 좌천리에 산다고 되어 있다

    안용복에 대해 "안비장(安裨將)","안병장(安兵將)","안병사(安兵士)"등 여러 호칭이 등장한다

    그는 1696년 두 번째 일본에 갔을때 '안동지(安同知)","울릉자산양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

    "조울양도감세장(朝鬱兩島監稅將)"을 칭하였다.

    나이도 1696년 당시 43. 33, 36세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분명하지 않다.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禄九丙子年 朝鮮舟着岸一巻之覺)

     

    20055월에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隱岐島)의 무라카와 가문에서 공개한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

    1696(원록 9, 병자년) 안용복이 일본 호키주(白耆州) 태수에게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독도 침범에 대한 항의를 하러 가다가

    오키섬에 기착했을 때 일본 관리들이 안용복을 조사, 심문한 조사이다.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조선8도지도를 꺼내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속해 있다.(此道中竹嶋松嶋有之)’고 하였다.

     

     

     

     

    안용복 피랍사건

     

    1618년 혹은 1625년 일본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가문이 울릉도로 도해 하기 위해

    '이소다케시마(磯竹島, 기죽도=울릉도)'인 것을 속이고 버려진(廢島) 무인도인 '죽도(竹島)'라고 하면서

    에도막부(江戸幕府)로 부터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았다.

    그로부터 오야. 무라카와 가문은 일본에서 자신들의 영지인 것처럼 행세하고

    토관(土官)을 파견하였다고 하고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었다.

    숙종조에 들어 우리나라 동남해연안민들이 대거 울릉도를 드나들면서 양국의 어민들이 이익을 다투게 되어 갈등이 생겼다.

    결국 1693년 일본 오야 가문의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에 대한 납치와 구금에 항의하였지만

    요나고(米子) 관리들은 에도(江戸)에 있던 돗토리 번주(鳥取藩主)를 통해 호키국(佰耆國)의 영지인 죽도를 침범한

    조선인들을 토관이 잡아왔다고 거짓 보고함으로 안용복의 처리를 문의하였다.

     

     

     

     

    울릉도(鬱陵島) 쟁계(爭界)의 승리(勝利)

     

    돗토리번(鳥取藩)은 에도막부(江戸幕府)에 조선어민들이 죽도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을 하였다.

    에도막부는'죽도(竹島)'가 조선의 '울릉도(鬱陵島)'인줄 모른 채 쓰시마번(對馬藩)으로 하여금

     본국의 죽도에 조선인들이 어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내도록 명하였다.(1693.11)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서로 자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영유권을 다투는

    울릉도 쟁계(일본에서는 죽도일건이라고 한다)’가 발생하였다.

    그 사이에 에도막부는 돗토리번의 영주에게 죽도와 송도(=독도), 두 섬이 돗토리번에 속하는지 물었다.(1695.12)

    돗토리번은 두 섬이 돗토리번에 속한 섬이 아니라고 회답하였다.(1696.1.25.)

    2년이 넘는 조사와 논쟁 끝에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의 울릉도인걸 알고

    죽도도해금지령(竹島渡海禁止令)’을 내렸다.(1696.1)

     

     

     

     

    도해금지팻말(1837)

     

    니가타(高田) 해안에 세운 죽도(竹島)는 조선 땅이므로 항해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경고판으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 일대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여 항해 및 어로를 금지한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도(竹島-울릉도)는 겐로쿠(元祿, 1688~1704) 시대부터 도해(渡海) 정지를 명령한 곳으로

    다른 나라 땅에 항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한다. 죽도를 항해해서는 안된다.

    해상에서 다른 나라 배와 만나지 않도록 하고 될 수 있는 한 먼 바다에 나오지 않도록 하라.”

    나무 팻말은 가로 72, 세로 33크기로 팻말 위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어 게시판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1696년의 안용복(安龍福)의 도일(渡日)

     

    국가의 허락 없이 월경(越境)한 죄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들 및 전라도 승려 뇌헌(雷憲) 등과 함께 11명이 탄 배로 울릉도로 갔다.

    이때 울릉도에 함께 간 배가 13척이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 어민들을 쫓아내고,

    그들을 뒤쫓아 가다가 오키섬(隱岐島)에 표류하였다.

    거기서 심문을 받고 호키주(伯耆州)에 들어갔다.

    이때 안용복은 미리 준비해간 관복을 입고 울릉자산양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고 쓴 깃발을 달았다.

    그는 조선팔도지도를 지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

    안용복의 활동으로 인하여 일본은 16972월에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서계를 보내어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에도막부(江戸幕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비교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첫째, 대한제국의 관리와 일본제국의 관리가 공동으로 울릉도 조사를 하고 난 뒤에 반포한 것이다.

    둘째, 칙령 반포와 함께 관보에 게시하여 국내외에 알렸다.

    셋째, 칙령 반포 전후에 일본인들의 울릉도 퇴거를 정식적으로 요구하였다.

    넷째, 울도군수의 관할 구역으로서 울릉도와 죽도(댓섬), 석도(독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다섯째,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 제40(1905)보다 5년 앞서 반포되었다.

     

    그에 반해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고시한 것이며,

     ‘관보(官報)’에 게시하지 않은 채 회람(回覽)’에 그쳤다.

    또 인접국인 우리나라에 문의나 정식 통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대한제국 칙령보다 가치가 떨어진다.

     

     

     

     

     

     

     

     

     

    죽도도항금지령(竹島渡航禁止令)에는 독도가 포함되었다.

     

    일본은 죽도도항금지령은 독도 도항을 금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도는 여전히 일본의 영토라고 우긴다.

    일본의 오야 가문(大谷家)의 사료에서 죽도(울릉도) 근변의 송도(독도)[竹島近邊松嶋]’(1659)라고 한 바와 같이

     죽도도항금지령에는 송도, 즉 독도도 포함되었다.

     ‘죽도도항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일본에서 독도만을 대상으로 어로활동을 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독도는 내손으로 지킨다!. 독도는 우리땅

     

     

     

     

     

     

    안용복 사당


    안용복 기념관의 우측에는 조경시설과 함께 안용복의 넋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후세들에게 전승하기 위한 목적의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28.08면적으로 건립된 사당에는 안용복 장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를 추모하고자 하는 관람객들이 참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죽도(竹島)

     

    울릉도 본섬에서 약 2km 동쪽에 위치한 죽도는 대나무의 일종인 섬조릿대의 고장으로서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댓섬, 대섬이라고 한다.

    면적은 0.208이며 정상부 높이는 약115m이다.

    과거에 2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한가구만 거주하며 주로 더덕농사를 짓고 있다

    과거 이곳에는 본섬과의 연락을 위한 봉수가 있었다.

    상부봉수는 불이 없었음, 중부봉수는 급한 용무를, 하부봉수는 급한 환자가 있음을 알렸다고 한다.

    죽도에는 샘물이 없어 빗물을 받아 사용한다.

    죽도의 섬조대릿대 숲길은 울릉도 최고의 명품산책로이다.

     

     

     

     

     

     

    안용복 조형물(安龍福 造形物)

     

    안용복 기념관의 실외에는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침탈에 대항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도일(渡日)을 감행한 안용복 장군과 그 일행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일본에 항거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안용복의 진취적인 기상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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