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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丹齋 申采浩先生 銅像)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7. 6. 6. 21:30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丹齋 申采浩先生 銅像)

     

    신채호(申采浩)
    신채호(1880~1936)는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애국지사였다.

    호는 단재(丹齋)이다.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으며, 예관 신규식(申圭植), 벽초 홍명희(洪命熹)와 함께

    산동 삼재(山東三才)로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18세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근대 문물 및 구국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는 등 각종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황성신문(皇城新聞)기자가 되어 논설로써 일제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고 주권 수호를 부르짖었다.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로서 항일 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사신론(讀使新論)·이순신전·

    동국고대선교사(東國古代仙敎史)등을 연재하고,을지문덕전·이태리건국삼걸전등의

    역사서를 국한문판으로 발행하는 등 우리나라의 역사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채호는 1910년 국치(國恥)를 앞두고 국운의 쇠함을 막아보고자 신민회(新民會), 청년학우회 등의

    구국 계몽운동조직에서 활동하던 중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중국을 경유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였다.

    1913년에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상해에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교포 청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그해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위임통치청원을 내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

    1923년에는 의열단을 위해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해 1월부터 5월까지 계속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를 이끌고

    임시정부 개조파와 노선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의견 접근이 안되어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가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집필된 그의 평론과 역사논문들은 1930년대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등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점차 소멸해 가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그후 19285월에 대만에서 외국 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 관련자로 일제에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여순(旅順)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복장(服章)을 추서하였다.

    신채호 동상은 19883월 단재동상건립위원회가 서울대공원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세웠다.

    서울대공원 서울동물원 매표소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채호가 한 손에 책을 들고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상 기단 뒷부분에는 검은 대리석에 다음과 같은 설립의 변이 새겨져 있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은 나라사랑의 붉은 마음과 칼날 같은 몸가짐으로

    항일 독립운동과 주체적인 민족사관을 뚜렷이 세우는 데에 생애를 바쳤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19367년의 옥고 끝에 일제의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단재의 조선사(朝鮮史)를 연재한 조선일보가 지령 2만호 기념으로 발기하고 유지들의 출연으로 여기 동상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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