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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짜장면박물관과 인천 선린동 공화춘(등록문화재 제246호)
    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7. 8. 3. 05:30

    짜장면박물관, 인천 선린동 공화춘(등록문화재 제246호)

     

     

     

     

     

     

    짜장면박물관

     

    짜장면박물관은 인천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옛 공화춘 건물에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인 공화춘(共和春)이 있던 곳이다.

    박물관에는 임오군란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했던 화교들의 역사와

    오늘날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는 짜장면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전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1층에는 1960년 공화춘 주방을 재현하고 있다.

    공화춘건물은 중국 호텔인 주점(酒店)으로 1908년에 지어졌다.

    건물은 중정을 갖춘 지상의 2층의 건물로 구운벽돌로 외장을 마감하고 있다.

    공화춘은 1912년 산동성 출신 화교인 우희광이 개업하여 1883녀까지 운영되었다.

    공화춘(共和春)이라는 이름은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로 지어졌다.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인천지역에서 유명한 중국요리점이었다.

    짜장면을 이곳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급 요리점이었던 곳이다.

    2012년 옛 건물을 복원하여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차이나타운의 역사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善隣洞)과 북성동 일대에 정착한

    화교들이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초기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하였다.

    상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동순태, 동순동 등 거상들이 자리를 잡았고

    중화루, 공화춘과 같은 유명한 중국 요릿집들이 개점하는 등 매우 번창하였다.

    광복후 선린동으로 동명을 개정하여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유지코자 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사회는 위축되었다.

    1990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이곳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품격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하였다

     

     

     

    화교의 고향


    인천 화교들은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역과 노동을 위한 경제적 이유,

    자국 내의 정치적 혼란 등을 피해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산동성 출신 화교 가운데는 영성현(榮成縣), 모평현(牟平縣), 문등현(文登縣)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특히 영성현과 문등현 출신들은 동향회를 결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기도 하다.

    산동성 영성현, 모평현, 문등현 등은 위해시(威海市)와 연태시(烟台市) 소속으로

    산동성 가운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교동지구에 위치한 지역이다.

     

     

     

     

     

     

     

     

     

    공화춘 현판(共和春 懸板)


    공화춘 현판은 짜장면박물관 건물이 중국 음식점 공화춘으로 사용되던 시절 건물 입구 외벽에 걸려 있던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195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는 현판에는 각각 共和春(공화춘)’,

    特等料理(특등요리)’, ‘包辦會席(포판회석, 연회석완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래는 일반적인 현판처럼 비스듬히 걸려 있었으나 1960년대 말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벽면에 직접 부착하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어 훼손이 심한 것을 수습하여 보존 처리하였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30년대 공화춘의 접객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즐기던 짜장면은 중화요리가 각광받던 일제 강점기에 비로소 음식점의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다.
    공화춘에서 수습된 유물을 그대로 활용해 접객실 내부를 재현한 이 공간에는 짜장면을 즐기는 다양한 인물모형과

    유물이 전시되어 음식점에서 즐기는 짜장면의 새로운 발전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외식문화 대표주자 짜장면


    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이다.

    1948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하였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더욱 대중화되었다.

     

     

     

    짜장면의 종류와 조리법

     

    한국의 짜장면 맛이 달다면 중국의 짜장면은 짠맛이 강하고,

    한국의 짜장면은 춘장을 볶다 물을 넣어 짠맛을 연하게 풀어주며,

    양파와 양배추 등 야채를 듬뿍 넣어 전체적으로 단맛이 나게끔 만든다.

     

     

     

    자장면? 짜장면!


    자장면이 맞나? ‘짜장면이 맞나?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여겨봤던 철자이다.

    국어사전은 이를 자장면(炸醬麵)’으로 표기해 왔는데, 중국식 발음은 짜지앙미옌(zhajiangmian)’이다.

    짜지앙미옌짜장미옌에서 짜장면으로 발음하기 좋게 자연스레 변천했을 터이나,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며 현실음과 다른 자장면을 표준말로 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짜장면을 즐겨 써 왔고, 그 발음이 중국 현지의 발음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맛이 다소 짜다는 이미지까지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국립국어연구원이 표기법상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짜장면이란 낱말을 통해 짜장면의 맛과 추억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짜장면 가격


    짜장면이 서민들의 대표적인 외식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물가 변동에 따라 가격이 변하게 된다.

    1960년대 초 쌀값이 3,010(80kg 한가마니) 할때 15원하던 짜장면 값은

    1970년대 중반 140, 1980년대 350원이었다가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면서 급등하게 된다.

    1990년대 초기 1,300원이었던 짜장면 가격은 2000년대 경제위기를 전후해

    짜장면은 3,000(쌀 한가마니 20만원)까지 치솟게 된다.

    현재 짜장면 한그릇은 4,000~4,500원으로 50년동안 450배가 올랐다.

    이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변화가 서민들의 외식 문화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적인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젓가락 이야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젓가락은 필수적인 식사도구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때부터 사용하였고 하며, 재료는 참대나무로부터 뼈, , 은 등 다양하였다.

    중국 북방에서는 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많이 쓰고, 남방에서는 참대젓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나무젓가락은 보기가 좋으면서 값이 싸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밖에 상류층과 고급 음식점에서는 상아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의 중국 통치자들은 금, 은 젓가락도 사용하였고, 특히 황제들은 독살을 염려해 은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였다.

    젓가락의 모양과 크기, 색깔도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음식을 굽거나 삶을 때는 긴 젓가락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여러가지 색깔의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남자용과 여자용을 구별하기 위해 크기를 달리하고, 날것과 익힌 것을 따로 집는 젓가락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결혼식 등 좋은 날에는 붉은색 젓가락을 사용한다.

     

    - 우리나라는 금속재질이며 중국과 일본의 중간크기이다.

    김치와 채소 같은 음식을 집기 편하도록 납작하게 생겼다.

     

    - 중국의 재질은 나무이며, 큰상의 중앙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긴형태이다.

    또한 기름진음식을 집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뚝하게 생겼다.

     

    - 일본의 재질은 주로 나무이며 작은 독상에 놓인 음식을 집기 용이한 짧은 형태이다.

    국수와 해산물을 집기 편한 끝이 뽀족하게 생겼다.

     

     

     

     

     

     

    .분식 장려운동


    .분식 운동은 국민 식생활 개선을 위한 게몽운동으로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곡물이 쌓여가자 정부에서 내려진 조치이다.

    보리, , 조 등 잡곡을 섞은 밥이 혼식이고 밀가루 음식이 분식이다.

    1964년부터 1977년까지 10여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 장려 운동은 대대로 이어온 쌀 중심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6513.8kg에 불과하던 1인당 연간 밀소비량이 불과 4년 뒤인 1969년에는 28.7kg으로 2배이상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다.

    .분식 장려 정책이 완화된 후에도 보리의 소비량이 급감한 것과는 달리

    밀의 소비는 그대로 유지되어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물이 되었다.

    밀을 활용한 제과업, 제빵업, 제면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철가방 이야기


    광복 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음식은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음식 배달을 위한 철가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었지만 너무 무거운데다가

    넘친 음식물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생기는 위생문제 때문에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플라스틱 철가방도 만들었으나 금형 비용이 비싸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알루미늄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함에 따라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명품 디자인 철가방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속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 중국음식점의 철가방을 선정했다.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등과 함께 큰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철가방이 명품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알루미늄의 색상이 밝고 깨끗한데다가 단순하지만 구조적인 기능이 뛰어난 데 있다.

    더불어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을 쉽게 닦아낼 수 있는 편의성, 약간 찌그러져도 원상 복구가 쉬운 친근한 가변성도 돋보인다.

    이같은 장점들로 철가방은 후세에 물려줄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유산이 된것이다.

    비록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음식배달용 도구인 철가방의 명성은 내내 빛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추억의 짜장면 그릇


    짜장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이 두툼하게 붙은 수더분한 사기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난다.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듬뿍 담아낸 국수와 짜장에서 만든 이의 넉넉한 마음씨를 읽기도 한다.

    양파와 단무지, 또는 춘장을 내놓는 종지도 요란하지 않아 좋다.

    식초와 간장병도 잊지 못할 추억의 식기이다.

    생김새나 장식은 다양하지만, 다른 그릇들과 우아한 하모니를 이루며 신맛과 짠맛을 자아낸다.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의 역사


    1950년대 한국 전쟁은 인명.재산 등 한반도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와 전쟁에 대한 공포 등 전쟁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배고픔은 가장 참기 힘든 고난으로 국가 차원에서 큰 고민거리였다.

    이때 식량난 해결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띠고 대한제분이 창립된다.

     대한제분은 국내 최대의 제분 시설과 생산량을 통해 국내 식량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1960년대 말부터 국내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다.

    특히 혼.분식 장려운동기 시절 국내 밀가루의 쓰임이 커지자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분식업계에 제공하면서

    밀가루 하면 곰표밀가루라는 용어가 탄생될 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고,

    최근까지 국내 밀가루 음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밀가루를 이용하여 라면을 비롯하여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다양한 봉지면이 만들어졌다.

    농심 짜파게피를 비롯하여 짜장면도 봉지면으로  만들어졌다.

     

     

     

     

     

     

    수타주방

     

    수타면은 모든 면 음식의 기본이다.

    전국 어느 중국 음식점을 가도 면음식을 주문하면 쿵 쿵소리부터 냈다.

    우리나라 수타면의 역사는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던 19세기말부터였다.

    밀대로 민다음 칼로 썰어 면을 뽑던 한국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 후 한국인들이 이 기술을 배우고, 중국 음식점을 개업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됐다.

     

     

     

     

     

     

     

     

     

     

    인천 선린동 공화춘(共和春) - 등록문화재 제246

     

    1908년 무렵 건립된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중국인이 지은 중국 요릿집이다.

    중국 산동 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 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의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 요릿집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선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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