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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 정조대왕의 행복한 수원행차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7. 10. 10. 05:30
을묘년(乙卯年)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행복(幸福)한 수원행차(水原行次)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2017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9월 23~24일)을 기념해
2017년 9월 7일부터 10월 9일까지 ‘을묘년 정조대왕의 행복한 수원행차’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시대 국왕 행차 중 가장 성대했던 을묘년(1795년) 수원행차와
조선 왕실 문화와 관련된 유물 20여 점이 전시됐다.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작은아버지 홍용한(洪龍漢)이 을묘원행에 대해 기술한 「화성행행일기」(華城幸行日記),
정조의 수원행차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8일간의 을묘원행 행사를 그린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 등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치러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린 음식을 기록한 ‘을묘진찬 찬품목’, 궁중 잔칫상도 전시됐다.
전시회를 개최하며~~~
조선후기 성군이라 칭송되는 정조대왕은 탕평군주이자 문예군주로
규장각 설치, 장용영 창설, 수원화성 축성 등의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수원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어 재위기간 동안 무려 13차례나 수원행차를 거행하였다.
1789년 수원으로 옮겨 조성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매년 참배하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대왕은 재위 20년이 되는 해인 1795년 을묘년 8일간의 성대한 수원행차를 위해
6천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수원에서 베풀어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222년 전 정조대왕의 가장 성대했던 행차를 2016년에 수원시와 서울시가 처음 재현하였고,
2017년에는 화성시까지 포함한 전 구간을 최초로 공동재현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정조대왕의 효심과 왕실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작은 전시회를 마련하였다.
수원으로 납시다!
정조대왕은 조선시대 그 어떤 국왕보다 행차를 많이 했던 임금이었다.
그는 24년의 재위 기간 중 66회 행차를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을묘년(1795년) 수원 행차는 조선 시대 최고의 국왕 행차로 평가된다.
을묘년은 정조대왕에게 여러가지로 의미 있는 해였다.
국왕 본인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었으며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회갑을 맞이하는 해였기 때문이다.
1795년 윤2월 9일 이른 아침 떠난 국왕의 행렬은 이튿날 저녁 수원에 당도하였다.
장안문으로 입성하기 전 정조대왕은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였다.
그 누구보다 위풍당당하던 국왕의 입성에 모든 백성들은 열렬히 환호하였다.
자신이 만든 신도시의 백성들과 마주하는 정조대왕 역시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대왕이 수원에 납시었다!
행복한 행차길
정조대왕은 6,300명이 넘는 수행원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을 수원으로 모셔왔으며
친누이인 청연군주(淸衍郡主)와 청선군주(淸璿郡主)가 동행하였다.
정조대왕은 가마를 타지 않고 혜경궁의 가마 뒤에서 어좌마(御座馬)를 타고 어머니를 호위하였다.
을묘년 수원행차가 그려진 ‘화성능행도’에는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가에
수많은 백성이 늘어서서 행렬을 구경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조대왕의 수원행차는 이동하면서 펼쳐지는 하나의 장대한 예숫 공연이자 볼거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정조대왕의 치밀한 계획과 더불어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명신(名臣)들과 함께 이룬 노력의 결과였다.
정조대왕은 행차길 내내 백성들이 가가운 거리에서 국왕의 행렬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며 그들과 직접 대면하였다.
백성들은 임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을묘년 수원행차는 조선시대 그 어떤 국왕의 행차보다도 가장 장대하고 행복한 행차였다.
그야말로 행복한 왕의 행차, 행행(幸行)이었던 것이다.
8일간의 축제
2년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행된 수원행차는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성공적인 행사였다.
8일간의 수원행차는 왕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의미를 지닌 행사였으며, 전조대왕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것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중대사였으며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방문한 것은 효의 실천이었다.
수원에서 개최한 다양한 행사 중에서도 봉수당에서 진행된 혜경궁의 회갑잔치는 축제의 핵심이었고,
당대 최고의 격식과 예술성을 담은 왕실 잔치였다.
정조대왕은 회갑연 이후 거행된 양로연과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는 것이 혜경궁의 뜻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드러내는 한편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에게까지 확대한 것이다.
을묘년 수원행차는 단지 왕실행사로만 그치지 않고 만백성이 함께하는 축제, 즉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축제였다.
8일간의 일정
1일째 / 윤 2월 9일
정순왕후에게 인사하고 혜경궁을 모시고 창덕궁을 돈화문을 나서다.
노량진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다.
시흥행궁에서 숙박하다.
2일째 / 윤 2월 10일
시흥행궁에서 출발하다
사근행궁에서 점심을 들다
저녁에 수원의 화성행궁에 도착하다.
3일째 / 윤 2월 11일
아침에 수원에서 첫 행사로 수원향교 대성전에 전배하다.
오전에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고 시상하다.(문과 5명, 무과 56명 선발)
오후에 봉수당에서 회갑연 예행연습을 하다.
4일째 / 윤 2월 12일
아침 일찍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참배하다.
오후에 서장대에 친림하여 군사훈련을 하고 이어 밤에도 군사훈련을 하다.
5일째 / 윤 2월 13일
아침부터 이번 행사의 핵심인 혜경궁의 회갑연을 하다.
6일째 / 윤 2월 14일
새벽에 수원부 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다.
오전에 낙남헌에서 노인 관료와 수원부 노인을 대상으로 양로연을 베풀다.
한낮에 방화수류정에 올라 수원을 시찰하고 돌아 오다.
오후에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저녁에 매화포를 터뜨리다.
7일째 / 윤 2월 15일
아침에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한양도성으로 출발하다.
사근행궁에서 점심을 들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하다.
8일째 / 윤 2월 16일
아침에 시흥행궁을 떠나 노량진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다.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저녁에 창덕궁으로 환궁하다.
정조대왕의 13차례 수원행차
제1차 1789.10.6.~10.9.(3박 4일)
아버지를 모신 현륭원에 처음 행차하다.
제2차 1790.2.8.~2.12.(4박 5일)
수원부 관아에 장남헌, 듣중정 어제현판을 내리고, 현륭원 참배 후 수원 남쪽 독산성에 행차하다.
제3차 1791.1.16.~1.18.(2박 3일)
노량의 주교를 이용하여 변경된 노정을 따라 현륭원 참배를 하다.
제4차 1792.1.24.~1.26.(2박 3일)
현륭원의 재전(齋殿)에 어진을 봉안하고, 환궁길에 지지대 이름을 명명하다.
제5차 1793.1.12.~1.14.(2박 3일)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다.
제6차 1794.1.12.~1.15.(3박 4일)
팔달산에 올라 화성의 공사 구간을 살펴보고 화성의 유래를 설명하다.
제7차 1795.윤2.9~윤2.16.(7박 8일)
을묘년에 회갑을 맞이한 어머니를 모시고 8일간의 대규모 수원행차를 나서다.
제8차 1796.1.20.~1.24.(4박 5일)
영화역, 관길야, 대유평, 만석거라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도록 하였으며
사도세자 탄신일에 맞추어 현륭원에서 작헌례를 거행하다.
제9차 1797.1.29.~2.1.(2박 3일)
전년 9월에 완공된 화성을 처음으로 순행하다.
제10차 1797.8.15.~8.19.(4박 5일)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무덤인 장릉(章陵)을 경유하여 현륭원에 행차하다.
제11차 1798.2.1.~2.5.(4박 5일)
만년제의 개축을 논의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현륭원 참배를 강행하다.
제12차 1799.8.19.~8.21.(2박 3일)
태종의 헌릉(獻陵)을 경유하고 과천로를 이용하여 현륭원에 행차하다.
제13차 1800.1.16.~1.18.(2박 3일)
왕세자(순조) 책봉을 알리기 위하여 생애 마지막으로 현륭원을 참배하다.
화성행행일기(華城幸行日記)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의 동생인 홍용한(洪龍漢, 1734~1809)이 1795년 수원행차에 대해 쓴 글이다.
그의 시문집 ‘장주집(長州集)’ 권17에 실려 있다. 홍용한은 혜경궁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열린 다양한 행사를 직접 지켜본 인물이다.
수원행차의 배경과 목적을 기술하고 국왕행렬 및 수원에서 펼쳐진 수원향교 배알, 낙남헌 과시, 현륭원 참배,
서장대 군사훈련, 봉수당 진찬연, 신풍루사미, 양로연 등 주요 행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화성일기(華城日記)
이희평(李羲平, 1772~1839)이 을묘년 수원행차 때 윤2월 9일부터 17일까지 수원을 다녀와서 지은 기행일기이다.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희평은 혜경궁의 이성(異姓) 6촌 친척이며 혜경궁 회갑연 잔치에 참석한 외빈 69명 중 한 명이다.
일기에는 한강 위에 설치한 주교(舟橋)의 모습과 정조의 행차 광경,
서장대에서의 군사훈련과 직접 참여한 봉수당진찬의 모습 등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군복차림의 정조대왕
전하(殿下)는 자궁의 뒤에서 융장(戎裝)을 입으시고 전립(戰笠)을 쓰셨는데, 붉은 털과 비취빛 깃이 마치 군의(軍儀)같았다.
아로새긴 활과 붉은 화살, 금빛으로 치장한 칼을 차고 적색 등나무로 만든 채찍을 들고 8척(尺)의 붉은 말을 타고 계셨다.
- 1795년 혜경궁의 작은아버지 홍용한(洪龍漢, 1734~1809)이 쓴 ‘화성행행일기’ 중에서 -
성상이 군복을 입자오시니 군복에 금으로 용을 그렸으니 금빛이 조요하여 날빛에 찬란하더라 ...
화성행궁에 도착하니 화성 마병도 모두 유의를 입고 돌아섰고 군례軍禮를 받드는 정조도 황금갑주에 유의를 입어 애닯더라.
- 1795년 혜경궁의 조카 이희평(李羲平, 1772~1839)이 쓴 ‘화성일기’ 중에서 -
이처럼 정조대왕은 매번 수원행차에 군복을 착용하였다.
그 이유는 생부 사도세자가 평소 군복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위한 수원행차에서는 모두 군복을 입었다.
정조대왕은 1795년 을묘년 윤2월 9일 아침 일찍 곤룡철릭(袞龍帖裡) 차림으로 창덕궁을 떠나
한강 주교를 건넌 후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시흥행궁으로 향할 때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윤2월 10일 수원에 도착한 정조대왕은 장안문에서 갑주(갑옷과 투구)로 고쳐 입고
장용외영의 군례(軍禮)를 받기 위해 군문(軍門)으로 들어갔다.
수원유수 겸 장용외사인 조심태(趙心泰, 1740~1799)가 길 왼편에서 무릎을 꿇고 국왕을 영접하였으며,
정조대왕은 봉수당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이희평은 이 모습을 정조대왕이 “황금갑옷을 입고 군례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같은 황금갑옷의 기록으로 인하여 드라마나 재현행사에서 정조대왕 역의 연기자들은 금색이 찬란한 갑주를 착용하곤 한다.
정조의 갑옷과 투구
1795년 윤2월 9일, 정조는 수원행차 시 융복(戎服)의 차림으로 창덕궁을 출발하였으나,
이튿날 장안문에 다다르자 군문(軍門)의 절차가 필요함을 밝히고
막차의 설치를 병조판서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명하여 갑주로 갈아입고 입성하였다.
또한 윤2월 12일 서장대에서도 군사훈련인 만큼 갑주차림으로 절차를 진행하였다.
‘서장대야조도’ 그림에서 장수들의 군복차림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갑옷과 투구는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현전하는 장수들의 갑옷과 문헌사료들을 토대로 복원된 재현품이다.
대모백은장옥구보도(玳瑁白銀裝玉具寶刀)
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玳瑁,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마감하여 제작한 환도다.
은으로 장식하고 코등이는 백옥을 사용하였으며,
칼자루에는 보도와 잘 어울리도록 중간에 매듭을 맺고 숱을 달아 격식을 높였다.
이 칼은 칼집의 아랫마개 장식, 윗마개 장식을 제외하면 철종 어진 속의 어도(御刀)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여
높은 신분의 인물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을묘년 수원행차 때 정조나 최고 지휘관도 이러한 칼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길이 62.2cm 1점, 수원화성박물관
생전에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 모습은?
정조대왕이 생전에 착용하였던 갑주의 모습은 그의 장례에 대해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명기(明器:부장품)로 제작된 갑옷과 투구에 대한 그림이 제시되어 있는데,
평상시의 것을 1/5로 축소하여 만든다고 밝히고 있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 보이는 정조대왕의 투구는 첨주(簷冑)다.
첨주는 둥근 모자형 투구(圓冑)에 가장자리를 따라 챙을 붙인 투구를 말한다.
그리고 갑옷은 청릉화(靑菱花)로 만들었는데, 9층(九積)의 찰(札)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갑옷 거죽에는 9층의 찰을 고정한 두정(頭釘)을 그렸으며,
갑옷의 가장자리(綠飾)에는 자적색 가죽(鹿皮)을 둘러 장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정조대왕은 챙이 있는 투구를 썼으며 갑옷은 안쪽에 9층의 찰을 대고
고정시킨 청색 두정갑(頭釘甲)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두정갑은 대부분 두석(豆錫)으로 만든 두정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지만
국왕의 것이므로 도금한 것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두정갑옷 대신 황금갑옷이라는 묘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정조대왕의 을묘년(1795년) 수원행차
음악소리가 차츰 가까워 오자, 멀리 임금이 타고 오시는 수레를 바라다보니,
마치 한 조각 붉은 구름이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아래에는 오색 기운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 마치 꽃과도 같았다.
자궁(慈宮)이 타고 오신 가마가 앞에 있는데, 궁중에서 기른 준마(駿馬)를 타고
옛 청귀(靑鬼)의 유제(遺制)를 이용해 꾸미고 새겼는데, 모두 황금빛으로 치장을 했다.
20여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여관(女官)이 좌우로 벌려 서서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두 군주(郡主)는 가마를 타고 일행 중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전하(殿下)는 자궁의 뒤에서 융장(戎裝)을 입으시고 전립(戰笠)을 쓰셨는데,
붉은 털과 비취빛 깃이 마치 군의(軍儀) 같았다. <중략>
승정원(承政院)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병조(兵曹) 및 군문(軍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모두 임금을 우러러 보았다.
북소리가 조화로웠고 말의 발걸음의 빠르기도 가지런하여 편안히 말을 몰아갔는데,
엄숙하면서도 나는 듯하여 진실로 태평성대의 기상이 있었다.
잠시 후 포성(砲聲)이 울려 사람들을 경계시키니, 임금의 행차가 멀리서도 보였다.
홍용한의 ‘화성행행일기(1795년)’ 중에서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윤2월 16일 아침에 출발하여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너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교는 정조대왕이 1789년 첫 현륭원 참배 때부터 사용하였는데,
수원행차 시 가장 적합한 곳인 노량진에 주교사(舟橋司)를 두어 운영하였다.
1795년 원행 시 2월 13일부터 24일까지 배다리를 설치하고, 다음 달 윤2월 4일에 건너는 연습도 시행하였다.
주교를 설치할 때는 그림과 같이 교배선(橋排船) 36척, 난간(欄杆) 240개,
홍살문 3개, 배다리 좌우 위호선(衛護船) 12척을 사용하였다.
수원행차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가 설치되었다.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1795년 윤2월 15일 수원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시흥행궁에 다다르는 장면이다.
그림의 중심인 혜경궁 가마 주변에 푸른 장막이 쳐져 있고,
그 곁에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임시 막차가 설치되어 있어 시흥행궁에 도착하기 전 잠시 멈춘 상태이다.
혜경궁 가마 뒤로는 정조대왕의 어좌마와 청연.청선궁주의 가마가 보이며,
행렬 앞에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둑(纛)과 용기(龍旗)가 보인다.
수많은 행렬을 보여주기 위한 지그재그형 구도와 원근법의 표현, 혜경궁 가마와 어좌마 등
중심인물을 집중시키는 구도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장엄한 국왕행렬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혜경궁홍씨 회갑을 축하하는 시 모음집
혜경궁홍씨의 회갑과 관련하여 정조와 신하들이 읊은 시를 모은 책이다.
1795년 윤2월 화성행궁에서 지은 화성봉수당진찬갱재축, 화성장대열무갱재축, 화성낙남헌양로갱재축과
1795년 6월 18일 혜경궁홍씨의 환갑 당일에 지은 자궁주갑탄신갱재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화성행궁 봉수당 진찬 시 정조가 지은 7언(七言) 4운(四韻)의 율시(律詩)와
이 시에 갱진한 홍준한(洪駿漢)과 그의 아들 홍낙수(洪樂受) 등 외빈(外賓) 70인과
유언호(兪彦鎬, 1730~1796) 등 제신(諸臣) 77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화창한 봄날 화성(華城)의 풍경과 혜경궁홍씨를 함께 모시고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감회를 표현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정조 19) 윤2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수원에 행차하고 현륭원을 참배한 전 과정을 정리하여 1796년 총 10권 8책으로 간행한 책이다.
1795년은 마침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이자 정조가 즉위한지 20년째가 되던 해였다.
그래서 정조는 신도시 수원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왕실잔치인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베푸는 등의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한층 정비된 의궤 체제와 풍부한 내용으로 인해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조선시대 의궤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책이다.
왕실(王室)잔치 봉수당 진찬연(奉壽堂 進饌宴)
수원에 당도한지 3일째 되는 날인 윤2월 13일 아침 8시 45분경,
드디어 예복을 입은 혜경궁의 등장과 함께 궁중음악이 흐르며 봉수당진찬연이 시작되었다.
이날의 주인공인 혜경궁은 ‘오늘의 이 경사를 주상과 더불어 만백성과 함께 하겠노라’며
친정식구와 함께 아들인 국왕이 마련한 잔치를 맘껏 즐겼다.
222년 전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는 궁중음식이 차려지고 궁중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궁중무용이 공연되는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가 밤늦게까지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진찬연에 참석한 왕실과 내외빈뿐만 아니라 일반 군사들의 잔치음식도 마련되었다.
잔치의 주인공인 혜경궁의 진찬상에는 자기 그릇에 담긴 70종의 궁중음식과
소별미(일종의 다과상) 12종이 올려졌으며, 42개의 상화(床花)로 존엄을 표시하고 장수를 기원하였다.
정조대왕과 누이 동생들인 청선군주, 청연군주의 상에는 그 수를 줄여 모두 20종의 궁중음식과
소별미 9종을 올리고 26개의 상화로 장식하였다.
그밖에 내빈은 11종의 궁중음식과 8개의 상화가 올려졌으며, 신하들에게도 궁중음식과 함께 상화가 장식되었다.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
1901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가 망팔(望八, 71세)에 이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린
진찬(進饌)에 관해 기록한 의궤로 진찬 다음해에 간행되었다.
활자본이며 총 3권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은 권수(卷首)에 해당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 체제에서 치른 첫 진찬의식을 기록한 것으로,
각종 의식 및 의장 등에서 이전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진찬 준비절차와 참가인원 등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을 뿐만아니라,
진찬에 쓰인 음악과 춤, 상차림, 꽃장식에서부터 동원된 인원 및 물품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봉수당진찬연을 다룬 ‘원행을묘정리의궤’ 이후 왕실잔치의 계승과 변화를 살필 수 있다.
혜경궁홍씨 회갑연에 올린 음식 목록(乙卯進饌饌品目)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베풀 때 올린 음식 품목을 한글로 기록한 책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부편:1 찬품(饌品)’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자궁께 올리는 찬안(饌案), 자궁께 올리는 주별미(晝別味) 1상, 내입(內入) 1상. 2상. 6상,
내외빈(內外賓)에게 올리는 상상(上床) 250상. 중상(中床) 20상. 하상(下床) 50상.
주별미 70상, 조정상찬품(朝庭床饌品) 상상(上床) 15상. 차상(次床) 205상. 중상(中床) 100상. 하상(下床) 130상,
시위백관상찬품(侍衛百官床饌品) 겸상(兼床) 60상, 유생하사찬품(儒生下賜饌品), 채화(綵花)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궁중채화(宮中彩花)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다.
무대 위의 여령, 약사, 초대 손님까지 모두 머리에 꽃을 꽂았으며,
진찬상과 손님들에게 마련된 상의 음식에도 꽃이 장식되어 있다.
더욱이 무대 중앙 양 옆으로 청화백자에 수북하게 꽂은 화려한 꽃과
휘장 장대에 여기저기 매달은 꽃다발이 무대를 장식하며 왕실잔치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이 모든 꽃이 궁중채화라고 하는 조화다. 궁중채화는 궁중의 연회나 의례 목적에 맞게 비단, 모시, 종이 등으로 제작한 꽃으로
생화를 꺽어 장식하는 것을 금하던 궁중에서 행했던 장식법 중 하나다.
존중의 뜻을 표현하거나, 평화 장수 건강 등의 상징으로 꽃을 이용한 왕실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왕실잔치의 장이 된 봉수당 역시 곳곳에 궁중채화가 장식되었다.
청화백자에 꽂은 화준(花罇), 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약사나 여령의 머리 장식꽃 등
을묘년 수원행사에 사용된 궁중채화는 모두 11,919개에 이른다고 한다.
궁중채화 역시 채색화로 남아 있어 오늘날 재현이 가능하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기리는 수원
수원시에서는 1974년부터 지역축제인 ‘수원화성문화제’에서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재현해 왔다.
또한 1795년 을묘년 수원행차의 전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1996년 최초로 국역(國譯)하여 원전(原典)과 함께 내놓았다.
이를 계승하여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을묘년 수원행차 220주년을 맞이해
‘원행을묘정리의궤’를 20년 만인 2015년에 교정.보완하여 재발간하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수원행차의 주요행사 장면이 담긴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의
국내외 소장본을 모두 모아 도록을 발간하였다.
정조대왕 수원행차길
창덕궁- 화성행궁간 행차길
수원화성박물관 입구에 있는 봉돈 모양의 우체통
수원화성 미니어쳐(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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