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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이시돌목장(ISIDORE FARM OREMIUM MILK)
    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7. 9. 28. 05:30

    성이시돌목장(St. Isdore Farm)

     

    성이시돌목장은 제주 지역 최초의 전기업목장(全企業牧場)으로

    1961년 말 양돈사업을 실시하였으며 면양을 사육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혁 

    19544월 콜룸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온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 J. Mcglinchey) 신부가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드넓은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여

    196111월 성 이시돌의 이름을 따서 중앙실습목장을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19644월 성 이시돌 배합사료공장(현 성 이시돌 사료공장)이 가동되었고,

    19694월 뉴질랜드에서 면양과 종돈이 도입되었다.

    19699월 개척단지 조성사업자금 및 기술지원을 시작하였으며

    19722월 호주에서 농가 종축 개량용으로 소 968두를 도입하였다.

    19733월 양돈 농가 약 200세대가 돈협업 농가를 조직하였고,

    19736월에는 호주에서 육용 종유 980두와 종돈 39두를 도입하였다.

    197612월 개척농가 조성 사업이 완료되었다.

    19817월 캐나다에서 농가 종축 개량용으로 육우·유우 겸용 축우 600두를 도입하였고

    19825월에는 호주에서 육우 870, 유우 156, 면양 70두를 도입하였다.

    198210월에는 호주에서 육우 1,016두를 도입하였다.

    198510월 치즈 가공 공장 건축 허가를 받은데 이어 19862월 영업 허가를 받았다.

    19909월 성 이시돌 한림수직사를 증축, 준공하였으며 199110월 성 이시돌 배합 사료 공장 현대화 시설을 준공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동길 35 (금악리)

     

     

     

     

     

     

     

     

     

     

     

     

     

     

     

     

     

     

    성이시돌목장 테쉬폰(Cteshphon)’


    이라크 바그다드 가까운 곳에 Cteshphon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 건축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기에 이러한 양식의 건물을 테쉬폰이라 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약2000년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형태의 건물을 볼 수 있다
    그 오랜세월 거친태풍과 지진으로부터 어떻게 온전히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쇠사슬 형태의 구조에 있다.
    이곳 이시돌에는 1961년에 처음 목장에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고

    이후 조금 작은 크기로 제작해 돈사로도 사용했으며 1963년에는 사료공장,

    1965년에는 협재성당을 건축하는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협재성당은 아직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테쉬폰 주택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이시돌에만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성이시돌

     

    성 이시돌 목장의 임피제 신부(神父)로 정식 이름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지난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으며 '임피제'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됐다.

    성이시돌의 이시돌(Isidore)은 독일계 유대인 자손 이시도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임피제 신부는 25세 때 사제 서품을 받고 1954년 제주에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제주도는 6·25전쟁과 4·3사건 등으로 매우 빈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지역이었다.

    신자들의 믿음을 길러주는 게 사제의 최우선 소명이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일이 더 급했다.

    하지만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을 벽안(碧眼)의 신부가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지역신용협동조합 설립(한국에서 네번째)이다.

    주민들의 사설 금융수단인 '()'가 깨져 신자 한사람이 자살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한라산 중산간 개간을 통한 목축업 육성이 제주지역에서

    가난을 물리칠 가장 중요한 방안으로 생각해 이에 몰두하게 된다.

    이시돌 목장은 그런 연유로 탄생했으며 '돼지 신부님'이란 애칭도 이 때 붙여졌다.

    사회적 소외(疎外) 계층의 복지에도 임피제 신부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설립하고 경로당과 양로원(요양원),

    유아원과 유치원, 청소년 시설인 성이시돌 젊음의 집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사제이자 지역개발가이며 박애(博愛)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제주에서의 지난 '60년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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