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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월 나혜석생가터(晶月 羅蕙錫生家址)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7. 10. 3. 20:29

    정월 나혜석생가터(晶月 羅蕙錫生家址)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나혜석은 189642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나영완(羅永完)의 손녀이며, 시흥군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수성 최씨 최시의(崔是議)

    5남매(요절, 弘錫, 景錫, 蕙錫, 芝錫)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나영완이 관직에 나가 출세했는데, 나영완은 호조참판(戶曹參判, 2)의 벼슬을 지내고

    증조부 등에게는 증() 호조참판 등 거듭 증직이 내려지는 등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 참판 댁, 혹은 나부잣집이라 불렸다.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의 개명인사로, 대한제국 당시 수원면장,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 군수를 역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5남매 중에는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나혜석이 1896년 태어날 당시의 주소는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 신풍동 51번지 일대)였으며

    대지 1791.9에 달하는 넓은 한옥으로 나혜석이 신식교육을 받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나혜석 연보(羅蕙錫 年譜)

     

    1896428일 나주나씨(羅州羅氏) 기정(基貞)과 최시의(崔是議)22녀 중 장녀로 출생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1910년 수원삼일여학교 졸업(현 매향여중 전신)

    1913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 졸업한 뒤,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입학.(여성 최초 서양화가)

    1914년 동경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學之光)’ 3호에 근대적 여권(女權)을 주장하는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 발표.

    1917년 동경(東京)에서 여성유학생들의 모임으로 朝鮮女子 친목회를 결성하고 여자계(女子界)’ 발표

    1918년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 졸업. 여성최초 단편소설 경희발표.

    19193.1운동에 여학생의 조직적 참가를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유화 개인전람회 개최.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현재의 단동시)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이주.

    1923어머니 된 감상기발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이후 매회 출품, 입상 또는 입선의 영광을 누림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으로 특선

    1927년 여성 최초 세계일주여행. 나혜석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남편은 영국에서 법학 공부를 함.

    6선전(鮮展)’ “봄의 오후가 무감사로 입선

    1929년 미국을 거쳐 귀국. 수원불교 포교당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 개최.

    1930년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김우영과 이혼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선전(鮮展)정원(庭園)”이 특선,

    같은 그림이 제12회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작약(芍藥)”, “나부(裸婦)” 입선

    1933년 여자미술학사를 열었으나 실패, 그림이 불타는 불운을 겪으면서 건강 악화.

    1934 “이혼고백장을 삼천리 8월호~9월호에 발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내어 세간의 화제가 됨

    1935년 수원군 태장면 지리 557번지로 이사, “신생활에 들면서발표. 서울에서 소품전을 개최

    1938년 마지막 글 해인사의 풍광발표.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34년까지 그림을 그림

    1948년 원효로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사망

    1995년 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 발족

    1999년 제1회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개최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구한말 사법관을 거쳐 시흥군수, 용인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23녀중 넷째이자 차녀로 1896년 수원면 신풍리(현 수원시 신풍동)에서 태어났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며 문학가, 민족 운동가, 여성 해방 운동가로 예술적 삶과 영혼을 꿈꿨던 선각자이다.

    화가로서의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으며,

    고희동 김관호 등과 더불어 1910년대 유화계의 선구자로 치열한 작가활동을 했다.

    또한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특선과 입선을 한 재능있는 화가였다.

    문학가로서의 나혜석은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현대단편소설로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로 인정받고 있으며, 희생한 손녀에게는 애국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민족운동가로서의 나혜석은 19193.1운동에 여학생의 조직적 참가를 논의하다가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개성과 평양에 가서 모금운동을 한 기록도 있다.

    여성해방가로서의 나혜석은 목숨보다 정조를 더 소중하게 여기던 시대에 맞서 외로운 투쟁을 했다.

    나혜서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라고 선언하며 여성도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혜석은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삶의 길을 선택했다.

    나혜석의 고단한 선택은 현재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재 탐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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