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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1. 25. 04:30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문성사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인성교육관 등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 원권과 5천 원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 산수도, 묵포도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단정한 필치의 초서, 전서 등의 글씨
사친(思親),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등의 한시가 전한다.
이이(李珥)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天道策),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죽헌동)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申師任堂 草蟲圖 花壇)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성 중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자수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림으로는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으며, 풀과 벌레 역시 잘 그렸다.
특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는 자연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을 직적 본 숙종대왕은 ‘오직 풀이요 벌레거늘 모습이 아주 비슷하구나.
부인이 묘사한 것이 어찌 이처럼 오묘할고’라는 시를 지었고
권상하는 ‘실물과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며 감탄할 정도였다.
오죽헌에서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선화,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
식물들 주위로 벌, 나비, 잠자리, 여치, 방아깨비, 쇠똥구리와 같은
날벌레와 길벌레가 모여 들면 마치 한 폭의 초충도를 보는 듯하여,
화단의 풍경과 그림을 직접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사임당 빛의 일기, 이영애 송승헌 손도장
이영애(극중배역 / 신사임당, 서지윤)
송승헌(극중배역 / 이겸)
사임당 빛의 일기에 출연한 연기자들의 손도장이 오죽 조형물에 새겨져 있다.
자경문(自警門)
율곡 선생이 20세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뜻을 기리고자 오죽헌 입구의 외삼문인 자경문(自警門)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
강릉 오죽헌 표석(江陵 烏竹軒 標石) - 보물 제165호
오죽헌(烏竹軒) -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연산군 때 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지낸 수재(睡齋) 최응현(崔應賢, 1428~1507)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외손 이이(李珥, 1537~1584)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건축물의 하나로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건물로 4칸짜리 대청과 2칸짜리 방과 마루로 구성돼 있다.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고미반자를 두었으며 삼면은 창호문으로 둘렀다.
주심포와 유사한 이익공계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심포 집에서 익공식 집으로 넘어가는 변천과정을 보여준다.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문성사(文成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사임당 배롱나무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母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栗谷松) 율곡매(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율곡송(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君子) 식물이다.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天工)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소나무 예찬에서 -오죽(烏竹) - 학명: Phyllostachys nigra
중국 원산의 왕대속의 일종이나 전래경로와 연대는 미상이다.
줄기의 색이 검기 때문에 오죽이라 불린다. 검정대, 흑죽, 분죽이라고도 한다.
높이 2∼10m에 달하고 나무껍질이 검은색이며, 잎은 장피침형으로 가지 끝에 5개씩 난다.
꽃은 6∼7월에 피고 과실은 영과(潁果: 벼의 열매와 같이 열매의 껍질이 건조하고 씨에 붙어있는 열매)로 가을에 결실한다.
줄기의 색은 처음에는 녹색이나, 가을 무렵부터 멜라닌 색소가 증가하여 검정으로 변한다.
색의 농담이나 변하는 방식은 입지에 따라 다르다.
이 식물은 품위가 우아하여 관상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이이(李珥)가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烏竹軒)’도 오죽(烏竹)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오죽이 많이 심어져 있는데 독특한 아름다운 인상을 준다.
이 나무는 토양의 비옥도, 수분을 많이 요구하나 내한성이 다소 있으므로 우리나라 중부 일부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
오죽은 방풍림 뿐 아니라 정원이나 공원에도 알맞은 수종이다.
안채, 바깥채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66년 정부의 문화재복원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柱聯)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구옥(舊屋)의 주련(柱聯)
이 주련 10폭 글씨는 조선 정조 때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을 판각한 것으로
명나라 진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나오는 시구(詩句)이다.
1) 得閒多事外(득한다사외) 한가로움은 많은 일 밖에서 얻고
2) 知足少年中(지족소년중) 흡족함을 젊은 시적에도 알더라
3) 種花春掃雪(종화춘소설) 꽃씨는 봄눈을 쓸고 심으며
4) 看籙夜焚香(간록야분향) 밤에 책을 읽으니 향기가 풍겨 온다
5) 有客來相訪(유객래상방)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6) 通名是伏羲(통명시복희) 만나보니 역시 훌륭한 선비님
7) 酒國有長春(주국유장춘) 술 있는 곳에 늘 봄이 깃들어 있고
8) 硏田無惡歲 (연전무악세) 선비의 마음속에는 풍흉을 모른다
9) 感慨甘捿遯 (감개감서둔) 고요함을 찾아 삶을 깊이 느껴보니
10) 環往破寂蓼(환왕파적료) 그것을 깨는 것은 오고 감아라
이이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어명(御命)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御製閣)이라고 부르며 벼루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御製) 어필(御筆)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내어 涵婺池(함무지)
공자의 도를 본받아 象孔石(상공석)
널리 베품이여 普厥施(보궐시)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龍歸洞(용귀동)
명성은 먹에 뿌려 雲潑墨(운발묵)
학문은 여기에 남았도다 文在玆(문재자)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저서 ‘격몽요결(擊夢要訣)’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걸’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마스코트(수호랑, 반다비)
수호랑
수호랑(Soohorang)은 2018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백호를 모티브로 삼았다.
수호랑이라는 이름은 '수호+랑'으로 이뤄진 합성어로,
'수호'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 참가자, 관중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며,
'랑'은 '호랑이'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정선아리랑’의 '랑'에서 따온 것이다.
조직위는 '백호'를 선택한 것이 1988년 하계올림픽 당시 마스코트였던 호돌이의 연속성을 지키면서,
한국의 민속 신앙에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며
인간을 보살펴주는 신으로 자주 등장하는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백호가 예로부터 흰색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얀 설원에서 펼쳐지는 동계 올림픽과 조화를 이룬다는 평도 있었다.
수호랑은 "도전 정신과 열정"이 넘치며, "올림픽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씩씩한" 성격이다.
반다비
반다비(Bandabi)는 2018 동계 패럴림픽의 마스코트다.
한국에 자생하여 대한민국과 강원도를 대표하는 반달가슴곰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의지와 용기를 상징한다.
'반다비'의 '반다'는 반달가슴곰의 반달을 의미하고, '-비'는 대회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다비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졌고, 평등과 화합에도 앞장"서는 성격이며,
패럴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이들의 열정을 응원하는 따뜻한 친구이다.
율곡선생행장기(栗谷先生行狀記)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 이곳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이원수(李元秀) 공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 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 살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自慶文)을 지어 입신행도(立身行道)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물두 살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 살 진사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스물한 살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스물세 살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스물아홉에 문과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좌랑(吏曹佐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우부승지(右副承旨)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사조(四曹 -戶曹,刑曹,兵曹,吏曹)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서른세 살(1568)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교육자 철학자이자 경세가인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정치 경제 사회개혁을 동호문답(東湖問答)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도(社倉制度)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때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학교모법(學校模範)을 저술하였다.
1584년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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