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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심도직물 굴뚝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1. 28. 20:42
강화 심도직물 굴뚝
이 곳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심도직물(창업주 金在紹, 7대 국회의원)은 1970년대에 종업원이 1,200여명에 달하여
지역경제발전은 물론 외화 획득에도 크게 기여한 향토기업이었다.
강화군에서는 소도읍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용흥궁공원을 조성(2005.5.25.~2008.5.30)하면서
심도직물을 기념하고자 강화읍 주민 모두의 뜻을 모아 이 표석을 세운다.
2008년 5월 30일 강화읍주민일동
심도직물 사건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서는 2015년 5월 10일 강화도 ‘심도직물’ 공장 터에 기념비와 조각상을 세웠다.
심도직물 공장 터는 천주교 강화성당 근처인 용흥궁공원에 있으며 지금은 굴뚝 하나만 남아 있다.
1967년~1968년에 강화도에서 일어난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 주교들이
주교단 차원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개입한 첫 사건이다.
심도직물 사건은 1967년 5월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가노청) 회원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불거진 노사 갈등으로 1968년 2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강화도에는 섬유 공장이 많았는데,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노동을 하고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 60% 이상이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노조가 만들어지자 회사가 조합원을 해고하고, 강화도에 있는 21개 직물회사가 모여
“가노청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하는 등 갈등이 커졌다.
이에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결국 심도직물이 속한 강화 직물업자협회가 2월 16일자 <조선일보> 등에 실은 해명서에서
“가노청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자 복직을 약속하면서 문제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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