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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3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2. 2. 19:30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 -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35

     

    이 비는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종묘(宗廟)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란했으나,

    청군(淸軍)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루(南門樓) 위에 화약(火藥)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殉國)

    충의(忠義)의 귀감(龜鑑)인 선원(仙源) 김상용선생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정조(正祖) 때 유수(留守)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金邁淳)이 건립한 순절비(殉節碑)이다.

    명종(明宗) 16(1561)에 출생한 김상용선생은 장령(掌令) 김번(金燔)의 증손(曾孫)이며,

    병자호란 때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의 형으로

    ()는 경택(景澤) ()는 선원(仙源),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선조(宣祖) 23(1590)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이래 인조(仁祖) 10(1632)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인조 15(1637)에 순국(殉國)였는데 그 위패(位牌)는 선원면(仙源面)에 위치한 충열사(忠烈祠)에 봉안(奉安)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구() 남문지(南門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비각(碑閣)을 옮겨 세우던 중 숙종(肅宗) 26(1700)에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인 선생의

    종증손(從曾孫) 김창집(金昌集)이 세운 구비(舊碑)가 발견되어 신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김상용(金尙容, 1561~1637)

     

    노서의 영수로, 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澤), 호는 선원(仙源풍계·계옹.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좌의정 상헌(尙憲)이 그의 동생이다.

    정유길에게 고문과 시를, 박수(朴受)에게 주역 (周易)’, 윤기(尹箕)에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황신(黃愼정협(鄭曄이춘영(李春英) 등과 사귀었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1598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에 다녀온 뒤 도승지·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서인으로서 한때 북인의 견제를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기도 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노서·소서(少西)로 나누어지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1630(인조 8) 기로사(嗜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초문에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강석기(姜碩期) 등의 변호로 순국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1758(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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