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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 사적 제133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2. 2. 04:30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 사적 제133

     

    고려 고종 19(1232)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1270)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6월 이령군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강화 고려궁지는 1964610일 사적 제1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승평문(昇平門)

     

    강화유수부 관아 출입문인 승평문.

    원래부터 정문이었는지 중문이 남아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관아 문루는 없고,

    맞배지붕의 삼문형식을 하고 있는 승평문이 동헌입구에 남아 있다.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건물로서 강화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다.

    인조 16(1638) 유수(留守) 김신국(金藎國)이 수리하였고,

    영조 45(1769)에 유수(留守) 황경원(黃景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썼다.

    강화부는 조선 인조 4(1626)에 강화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건물구조는 정면 8,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여러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크게 주목받게 되고

    국왕과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1782(정조 6)에 건립하였다.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강화동종(江華銅鐘)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다.

    숙종 14(1688)에 강화유수 윤자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강화유수 민진원이 숙종 37(1711)에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銘文)에 옛 종은 사인(思印)이 만들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租信)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사인비구(思印比丘)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동종은 8개 중 하나이다.

    1977년 고려궁지로 이전하였으나 199910월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강화동종은 높이가 198cm, 밑지름이 138cm, 두께가 15cm이다.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


    강화유수부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효종 5(1654)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1783)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구조는 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 마루가 12,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광해군 14)에는 봉선전(奉先殿: 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21(인조9)에는 행궁(行宮)을 건립하였고, 1638(인조 16)에는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효종 5)에는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숙종 21) 장녕전(長寧殿), 1713(숙종 39) 만녕전(萬寧殿)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정조 6)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 태웠다.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고려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뒤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고려궁지 연혁

     

    1232 고려수도 강화로 천도

    1234 고려 강화궁궐 건립

    1270 개경으로 환도, 궁궐건물 파괴 

    1622 봉선전 건립 (태조의 영정 봉안)

    1627 강화유수부로 승격

    1631 조선행궁 건립

    1636~1637 병자호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일부 건물이 불에 탐)

    1638 유수부 동헌 개축

    1654 이방청 건립

    1695 장녕전 건립 (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1713 만녕전 건립 (조선 국왕의 영정 봉안)

    1781~1782 외규장각 건립 (왕립도서관)

    1783 이방청 중수

    1866 병인양요 (프랑스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탐)

    1964 고려궁지 사적 지정 (133)

    1977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2003 외규장각 복원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이곳은 고려 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1232)에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로 지정 되었고 1977년 강화 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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