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자산문화도서관, 자산문화관(玆山文化館)
    국내 나들이/전시관(展示館) 2018. 3. 19. 20:08

    자산문화도서관, 자산문화관(玆山文化館)

     

    1(385.88)

    관광정보실 : 다도해해상공원? 흑산도의 미래도시 모형, 영상시설, 인터넷검색코너

    자산어보1: 송암 정약전선생의 유적, 복성재 모형, 자산어보소개, 어류 검색코너

     

    2(333.52)

    자산어보2: 해양디로라마 인조수족관, 어류이동경로

    해양도서실(열람석 36, 향토유물실, 휴게실

     

    도서현활 총 10,807

     

    개관일:20027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흑산일주로 5 (예리)

     

     

     

     

     

    자산어보(玆山魚譜)

     

    자산어보(玆山魚譜)1814(순조 13)에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저술한 어보(魚譜),

    흑산도 연해의 해양 생물에 대한 자세한 관찰 기록을 한 책이다.

    정약전은 해양 생물을 인류 20항목, 무인류 19항목, 개류 12항목, 잡류 4항목으로 총 55개의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발전된 과학 기술은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더욱 대중적으로 활용되었다.

    농업에서는 17세기 중반 신속(申洬, 1600~1661)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하여 모내기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세기에는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지어 해양 생물에 대한 관찰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이제마(李濟馬, 1837~1900)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편찬하여 사상 의학을 완성하였다.

    정약전은 1801년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었고, 1814년까지 생활하였다.

    정약전은 흑산도 바다에 살고 있는 다양한 해양 생물의 이름을 조사하고, 섬세하게 관찰하여 자산어보를 완성하였다.

    자산어보는 총31책으로 제1권 인류, 2권 무인류 및 개류, 3권 잡류로 되어 있다.

     

    인류(鱗類)

    석수어(石首魚치어(鯔魚노어(鱸魚강항어(强項魚시어(鰣魚벽문어(碧紋魚청어(靑魚

    사어(鯊魚검어(黔魚접어(鰈魚소구어(小口魚도어(魛魚망어(0xF43C청익어(靑翼魚

    비어(飛魚이어(耳魚전어(箭魚편어(扁魚추어(錘魚대두어(大頭魚)

     

    무인류(無鱗類)

    분어(鲼魚해만려(海鰻鱺해점어(海鮎魚돈어(魨魚오적어(烏賊魚장어(章魚

    해돈어(海豚魚인어(人魚사방어(四方魚우어(牛魚회잔어(繪殘魚침어(鱵魚천족섬(千足蟾

    해타(海鮀경어(鯨魚해하(海蝦해삼(海參굴명충(屈明蟲음충(淫蟲)

     

    개류(介類)

    해구(海龜(((((담채(淡菜((율구합(栗毬蛤구배충(龜背蟲풍엽어(楓葉魚)

     

    잡류(雜類)

    해충(海蟲해금(海禽해수(海獸해초(海草)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유래

     

    자산(玆山 혹은 慈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다.

    흑산이란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번번히 현산(慈山)이라고 쓰곤했다.

    자는 자와 같은 뜻이어서 이다.

     

    -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 중에서 -

     

    자선어보는 지금으로부터 약200여년 전에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서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손암 정약전 선생이 저술한 우리나라 5대 고수산 문헌 중 하나이다.

    손암 선생은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이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지금의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1801~1816)되어 사망할 때까지 16년간(우이도 6, 흑산도 7, 우이도 3)

    흑산도에 머물면서 흑산도 인근에서 생산되는 각종 어.패류와 해산물 등 약227종에 대하여

    생태계 현장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내용이 이 한권에 책에 담고 있다.

    손암 선생은 처음에는 섬사람들의 불확실한 지식들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해족도설(海族圖說, 지금의 해양생물도감)로 책을 저술할 계획이었으나

    아우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 내용 중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 보다는 글로 쓰는 것이

    나을 것(필사가 불가능하고 인쇄가 힘든 그림보다는 누구나 쉽게 필사하고 인쇄하여 돌려볼 수 있는 형태)이라는

    짤막한 충고에 오늘의 자산어보가 저술되게 되었다.

    하지만 자산어보200여년전의 책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세밀한 관찰과 기막힌 묘사,

    합리적 추론과 광범위한 문헌고증 등 역사적인 의미나 자료로써의 가치 또한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자산어보는 총3권의 필사본으로 네 질이 전해온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자산어보에는 총227종의 수산 동. 식물이 유형별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중 제1권에는 인어류(鱗魚類, 비늘이 있는 어류) 73종이 서술되어 있고,

    2권에는 무인어류(無鱗魚類, 비늘이 없는 어류) 42종이 서술되어 있으며,

    3권에는 개류(介類) 69종과 잡류(雜類)43종 서술되어 있다.

    또한 잡류로는 해충(海蟲), 해금수(海禽獸), 해초(海草) 등으로 나누어 서술되어 있다.

    물론 현대 어류학의 분류와는 다르고 우리나라 근해에 분포되어 있는 어류만 해도

    현재 대략 870여종이나 되어 비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이 장비도 없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 정도로 상세한 관찰을 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 있다 할 것이다.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수산 자연과학 연구에 5대서적 중 최고로 꼽힐 정도로 기술이 잘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동안 자산어보는 순 한문으로만 저술되어 있어 학문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자산어보가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몇몇 국학자나 고서 수집가들에게만 알려져 있을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산어보의 번역 출간을 처음으로 제의한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시부자와라는 일본인 이었다.

    자산어보가 대중앞에 나서기 까지는 16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결국 1977년 정문기씨에 의해 자산어보 완역본이 출간되게 되었다.

    그 이후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신안군에서 자산어보에 대한 번역과 해설,

    그리고 원색도감을 재편하였는데 어.패류에 관하여 학문화되어 있지 않은 것을 정립하기 위해 학명을 정리하였고,

    .패류의 생태계와 이동경로, 습성, , 방언, 약효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후세 학문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있다.

    이와 함께 손암 선생의 일대기, 손암 선생의 친동생인 다산 선생과의 유배생활 중

    오고간 서신을 곁드리고 있어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손암 선생이 유배지인 절해고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하게 된 배경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선 손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생활환경 즉 지리적 환경여건을 들 수 있다 하겠다.

    손암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한강변에 위치한 마재마을 산기슭에 두호정사터에 자리한다.

    마재마을은 남한강 줄기에 자리잡아 온갖 물고기가 풍성하게 나던 곳이었다.

    어린시절 시골아이들에게 기징 즐거운 놀이라면 역시 물고기잡이를 빼놓을 수 없다.

    선생도 이러한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이 틀림이 없다.

    형제들과 어울려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던 어린시절의 경험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물고기에 대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이를 연구하도록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또한 어린시절 개울이나 냇가, 바다를 누비며 쫒아 다니던 추억이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어린시절 자연을 접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속에 남아 자연에 대한 친밀감과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선생은 기본적으로 자연과학 자체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를 위한 학문적 소양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겠다.

    선생이 어보를 기획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에는 성호 이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생물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보인바 있다.

    선생은 성호사설이란 책에서 보았던 생물들을 흑산도에서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성호 선생이 관심을 보였던 생물들은 선생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고

    강렬한 호기심과 탐구열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선생이 지금껏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 주저함 없이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성호 선생과 같은 선배 학자들의 선구적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사료된다.

    마지막으로 우이도 사람 문득순의 표류 경헝담을 글로 정리하면서 선생은 해양문화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에 절실히 필요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물고기 생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 않았나 한다.

    하여 물고기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 절해고도에 유배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토종생물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인 자산어보라는 생물학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서학(西學)과 천주교(天主敎)

     

    조선왕조 18세기를 전후하여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계기는

    유교나 불교 기타 학문이 그러했듯이 중국을 통해 서학이라는 외래 학문에 껴 묻어왔다.

    서양문물과 함께 전래된 가톨릭교에 대하여 처음에 유학자들은 종교생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적 사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흥미를 느꼈다.

    당시의 학자 중에서 가톨릭교에 흥미를 느끼고 또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로는 이익(李瀷)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들 이었는데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히는 과정에서였고

    그중의 일부는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권철신(權哲身). 일신(日身) 형제와 이벽(李檗),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이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삼형제도 서울에 온 이후에는 이벽(李檗)을 따라 다니다가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여러권의 가톨릭 서적을 탐독한 후 흔쾌하게 그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유교의 근본 원리인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하여 천주교의 구세복음사상(救世福音思想)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윤리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현실생활을 하나의 고난으로 받아 들여야 했던

    여러 사회계층의 사람들, 특히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실세(失勢)한 남인 학자에 의하여 신봉되었으나 차차 재야(在野)의 양반, 중인(中人)의 상인(常人),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압박을 받던 부녀자층에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갔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된 형태는 중국과 달리 특별한데가 있었다.

    성직자들에 전교된 것이 아니라 서적이나 교리를 접한 민간인에 의해 자생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점이다.

    천주실의나 칠극 등의 책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교리연구가 행하여졌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주체적으로 수용되어 신앙의 터전을 닦았으나

    신자가 늘어 갈수록 유교적 전례 문제와 기존 가치관의 갈등을 보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천주교 역사가 있기까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이벽이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천주교 전파를 위해 헌신한 노력의 가치이며 만일 이벽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파는 50년에서 100여년은 늦어 졌으리라는 말이 그의 생애를 대변해준다 하겠다.

    가톨릭교는 그 의식 및 교리가 조선시대 지배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유교의 그것과 상치되는 점이 많았으며

    만민 평등을 주장하며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에도 위협을 주게되어 마침내 조정에서는

    1786(정조 10)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렸으며 그중에서도 순조 1년에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앞에서 열거한 남인 학자 등 많은 명사(名士)와 신도들이 죽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조선 사람으로서 최초의 한글 교리서를 지어낸 선생의 아우인 정약종을 비롯하여

    조선 천주교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본명:베드로), 최초의 총회장 최창현, 전도자 이벽,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이며 명례방 집회를 주도했던 김범우 등이다.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비롯하여 이들은 모두 지금은 가톨릭성지로 널리 알려진

    절두산 순교박물관이 위치한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죽거나 심하게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하였다.

    가톨릭교는 조선시대의 국가사회 조직에 대하여 결정적인 개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신유사옥(辛酉邪獄) 또는 신유시화(辛酉士禍)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권력 구조를 시도하려 했던 정조 때에는 서학과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러나 경신년(1800) 정조가 훙(, 죽음)한 후,

    정조 임금의 뒤를 이어 11세의 나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새로이 정권을 잡은 보수 세력(노론 벽파)들이

    정조(正祖)가 불안해 했던 정치 현상을 일신하고 보수적 권력구조를 강화하고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김귀주(金龜柱, ?~1786)의 누이동생 정순왕후 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노론 벽파의 두목(頭目)인 영의정(領議政) 심환지(沈煥之, 1730~1802)

    대사간(大司諫) 목만중(睦萬中) 등이 옛날 사도세자를 두둔하던 진보적 정치세력,

    즉 남인 시파 인사들과 연계된 천주교도(天主敎徒)에 대하여 대규모의 무자비한 살육과 숙청을 감행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신유년 순조 1(1801) 1월부터 226일까지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을 장살(杖殺)하고

    중국인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를 비롯해서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최필공(崔必恭),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등을 참형(斬刑)하고 정조(正祖)의 아우이며 철종(哲宗) 임금의 조부이신 사언군(思彦君) () 내외(內外)

    그 며느리 송씨를 사사(賜死)하는 등 당시 명사(名士) 300여명을 처형하거나 혹은 유배를 보냈으며,

    천주교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은 관직에서 쫓겨났는가 하면

    그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규모의 박해가 가해진 데는 부패하고 타락한 양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탄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손암(巽菴) 선생과 아우인 다산(茶山) 선생도 유배의 길을 가게 되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