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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역사관(農村振興廳 農業技術歷史館)
    국내 나들이/전시관(展示館) 2018. 1. 13. 05:24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역사관(農村振興廳 農業技術歷史館)

     

    1962년 설립되어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농업발전과 농촌근대화에 기여했던 농촌진흥청이

    20147월 전북혁신도시(전주시)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2016년 문을 연 농업기술역사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의 농업정책, 1970년대 녹색혁명과 2000년대 지식혁명에 이르기까지

    농업의 변천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어린이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에게 농업의 역사와 소중함을 전달하고 있다

    역사관은 모두 4구역으로 나눠져 있으며,

    1구역은 농업기술의 첫걸음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농업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2구역은 혁신적인 농업정책을 펼친 정조대왕의 업적과 농촌진흥청의 태동기를 다루고 있다.
    3구역은 농촌진흥청 발족 이래 획기적으로 발전한 농업기술성과로 식량, 원예, 축산 등 분야별로 확인할 수 있다.

    4구역에서는 농업이 첨단과학기술을 만나 더욱 편리하고 스마트해진 미래농업을 엿볼 수 있다.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레이어드 영상을 비롯해

    농업과 접목된 다양한 융합기술, 농업로봇 등 경계를 넘어선 차세대 농업기술이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인로 126 (서둔동)

     

     

     

     

     

     

     

     

     

     

    정조가 꿈꾼 강한 나라

     

    정조 2년인 17786, 당시 사회는 마치 병든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든 사회를 타개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혁과제를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장대고(更張大誥)’이다.

    또한 당대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농서대전(農書大全)’ 편찬을 추진하였다.

     

    백성이 풍요롭게 살고, 인재를 키워 나라를 살찌우며, 군사제도를 강화하여 국방력을 키우고,

    재물의 씀씀이를 다져 재정이 튼튼한 나라...

    경장대고(更張大誥)’의 주요 골자

     

     

     

    정조(正祖, 조선 제22대 왕)는 매년 정월에 권농교(勸農敎)와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농사지을 것을 권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이에 대한 행정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농업진흥 정책을 펼쳐 나갔다.

     

     

     

    정조의 윤음(綸音 -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문서)

     

    1794(정조 18) 화성축조가 한창 진행되던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정조는 신하들과 화성성역의 진행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성역을 중단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 화성 북쪽의 평평하고 비어있는 땅을 개간하고 관개(灌漑)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면

    옥토가 되어 생산량이 높아지고 이를 이용하면 화성축성 공사를 지속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농사직설(農事直說)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국의 농사기술책과 차별화되는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책을 펴냈다.

    이러한 책을 농서(農書)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 세종 11(1429)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있다.

    농사직설은 지방 권농관의 지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로 속속 간행된 여러 가지 농서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수원화성(水原華城)과 축만제(祝萬堤)

     

    정조는 1794년 화성성역을 일시 중지하는 한편 둔전을 만들고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도록 명하였다.

    만석거 축조로 인해 화성 장안문 밖의 척박했던 대유평 지역은 수전지대로 변했으며 극심한 가뭄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798만년제(萬年堤)’, 1799년에는 축만제(祝萬堤)’가 연이어 화성에 축조되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상도시를 만들고 싶었던 정조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물을 다스려 화성의 기반을 만들었다.

    수리시설 축조와 더불어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수확물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실용적인 농업기술을 활용해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실학정신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만석거, 축만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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