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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八尾島 燈臺)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5. 3. 04:30
대한민국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八尾島 燈臺)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서남해(西南海)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항로표시의 효시(嚆矢)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1894년 공무아문(工務衙門)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小月尾島), 북장자서(北長子嶼), 백암등표(白岩燈標)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點燈)되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장군
인천상륙작전, 등대에 불을 밝혀라.
1950년 9월 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전사에 길이 남는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대위, F 클라혼 미 육군소령, 죤 포스터 미 육군중위, 계인주(桂仁珠) 육군대령,
연정(延禎) 해군소령, 최규봉(崔奎峰) KLO 8240 고우트대(隊) 대장 등 6명이었다.
9월 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 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 불능 상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 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운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 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 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 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
글 : 具 常(시인, 당시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
1999년 9월 14일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팔미도 등대
관리번호 : 14-2-36
관리자 : 인천지방해양항만청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팔미로 15 (무의동)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클라크 미군 대위가 한국군 유격부대(KLO)의 지원을 받아 확보하여 점등한 등대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수집 활동을 펼치고 있던 클라크(Eugene F. Clack) 미군 대위는
팔미도의 등대가 북한군에게 파괴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유엔군사령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작전 시간에 맞추어 팔미도 등대에 점등할 것을 명령하였다.
클라크 대위가 한국군 유격부대의 지원 하에 9월 14일 야간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에 불빛을 밝히면서
유엔군 함대는 안전하게 인천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팔미도 등대는 1883년 인천항 개항이후 선박 운항의 안전을 위해
1902년 5월에 착공하여 1903년 6월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2003년 현대식 등대가 새로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팔미도 등대 옛 사무실
구조 : 단층 목조, 함석 지붕
연면적 : 21.25㎡
설치연도 : 1903년 이후 (건축연도 미상)
이 건물은 1903년 6월1일 팔미도 등대 점등 이후 건축하여 1962년 5월 콘크리트 건물로 신축할 때까지 등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이 사무실은 박공지붕형태의 단층건물로서 좌우 벽면에 각각 2개, 후면에 1개의 오르내림창이 있으며,
정면에는 포치 형태의 현관을 두고 있다.
내부 천정과 함께 바닥은 목재의 마루 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하부에는 4개의 환기구가 설치되어 습기로 인한 피해예방과 해충의 침입을 방지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군인 교회로 사용하여 오다가 팔미도 등대 점등 100주년을 맞아 옛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등대원의 하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점등되었다.
팔미도 등대는 지난 한 세기동안 인천항을 드나드는 수많은 배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거쳐간 등대원만도 수백 명에 이른다.
이들의 하루 업무는 시작과 끝이 없었다. 안개가 자욱한 주간에는 무신호(霧信號)를 취명하여 등대의 위치를 알렸으며,
밤이 되면 등대 불을 밝혀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
단시에는 기술이 낙후되어 많은 고충이 있었다.
등대원들은 등대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경유 2통을 지게에 짊어지고, 71m 높이의 야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
겨울철에는 땔감을 섬에서 직접 구해야 하고, 여의치 않을 땐 차가운 방에서 떨며 겨울밤을 지새운 일도 많았다.
매일 수동으로 불을 켜야 하기 때문에 사시사철 비상상태로 근무를 해야 했다.
1959년 당시 곽춘만 등대장의 일화를 소개하면 “그 해 겨울은 잊을 수가 없다.
250톤급 기중기선이 팔미도 해안가 암초에 좌초되었는데, 썰물이 시작되어 시간이 지나면 배가 넘어갈 위험에 처해있었다.
이때 곽춘만 등대장, 윤중길 등대원, 정인근 등대원은 얼음장 같은 바다에 뛰어들어
기중기선까지 헤엄쳐서 긴 쇠파이프를 배 밑에 끼어 걸었다.
그리고 쇠파이프에 로프를 걸어 배에 있는 기중기에 걸고 당기기를 몇 번, 배가 돌면서 암초에서 탈출하였다.
배의 엔진소리를 들으며 등대원들은 다시 해안가로 죽을힘을 다해 헤엄쳤다.
간신히 해안가에 도착한 등대원들은 살을 애는듯한 추위에도 뿌듯하였다.
팔미도 등대(八尾島 燈臺)
인천항에서 8.5해리(15.7km) 남쪽에 위치한 이 섬은 사주(沙州)에 의해 연결되어
그 형상이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라 불리어 왔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오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仁川八景)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이다.
1883년(고종 20년) 인천항이 개항되어 선박 운항이 빈번해짐에 따라 등대의 효용성이 대두되었다.
1902년 3월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인천항 입구 팔미도, 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서,
백암 등표 건설에 착수하여 1903년 6월 1일 점등 운영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이다.
팔미도 등대는 점등 당시 석유 백열등(전기 회전식 6등급 등명기)으로 불빛을 밝혀왔으나
1954년 8월 발동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등(광도 50,000cd, 18해리 : 33Km)으로 교체하였고,
1991년 9월부터 태양광발전 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1963년 12월 무선표시국을 설치하였으며 1999년 8월 위성 항법 보정 시스템(DGPS 기준국)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정교한 위치정보를 제공하는 등 항로표지 분야의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해왔다.
인천지방해운항만청은 2003년 한국등대 100년을 맞이하여
동북아 물류중심국가의 중추항만으로 부상하는 인천항의 해양환경변화에 맞추어
지난 100년동안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항해길잡이 역활을 해온 팔미도 등대를 퇴역시키고
현대적인 조형미와 위성항법 보정시스템 등 첨단 항행지원 장비를 갖춘 「100주년 기념등대」를 건립하였다.
새로 건립된 기념등대는 2002년 8월 총사업비 38억원을 들여 높이 31m의 등탑, 사무실, 전망대를 갖춘
지하1층, 지상4층, 연면적 695㎡ 규모의 업무시설과 348㎡ 규모의 직원 숙소 및 등대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3년 12월 준공하였으며, 팔미도등대 100주년기념 조형물 "천년의 빛"을 설치하였다.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설치한 암울한 역사와 6.25전쟁 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희망의 역사를 지켜보며
100년을 보낸 팔미도등대(높이 7.9m)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제40호)로 영구히 보전 관리하게 되고,
이 자리에 해양 한국의 미래를 선도할 첨단등대가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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